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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별 Nov 19. 2021

수능을 마친 당신에게

11월 18일의 악필 편지


제가 수능을 본 시험장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고등학교였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교문을 터덜터덜 걸어나오는 길,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유난히 날이 선 바람도, 이상하리만치 맑았던 하늘과 섬뜩하도록 붉었던 노을도, 그리고 그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저 자신까지도요. 그 어느 때보다 느린 발걸음을 떼며 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고문을 받다 풀려난 기분이라고요. 돌이켜보건데 그 날 저녁은 지독하리만치 질기게 인연을 이어가게 된 나의 친구, 무력감과 처음 조우한 때였습니다.


무력감이 수능을 망친 것으로부터 시작된 건 아니었습니다. 수능은 펄펄 끓는 기름에 튄 불똥 같은 것이었지요. 아마 수능날 제게 운이 좀 따랐고, 그래서 훨씬 좋은 성적을 거뒀더라도 언젠가 저는 무력감을 맞닥뜨려야 했을 겁니다. 저는 저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 건, 잠 없이 보냈던 수없이 많은 밤들이 무의미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저는 제가 피땀을 흘려 무언가 성과를 거둔 적이 없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저는 저의 노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즐거웠던 추억도 노력이었고, 쓰디쓴 좌절도 노력이었습니다. 매 순간에 제게 주어진 것에 충실하고자 했던 연습은 어떤 식으로든 제게 보답하였습니다. 그게 제가 원했던 보답이 아닐 때가 종종 있었을 뿐이지요. 당장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저는 무력감과 오래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으로 과거를 돌이켜보곤 합니다. 제가 몰랐던 그 때 그 노력의 가치를 이제는 이따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원하는 성적을 거뒀거나 그러지 못했겠지요. 후련하거나 또는 갑갑하겠지요. 기쁘거나 슬플테고, 덤덤하거나 흥분했을 겁니다. 저처럼 오늘의 경험이 오랜 시간 당신을 지배할 수도 있을테고,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하루가 되어 지나갈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그러했고, 그 자리를 지나 온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요. 12년의 교육과정을 거치며 당신이 해 온 것은 - 야자를 밥먹듯 튀었든, 전교 순위권에서 놀았든 - 그 자리에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노력이라고 불릴 만한 일일 겁니다. 누구나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살아가니까요. 이따금 자신 스스로가 그걸 까먹어버릴 뿐이에요. 


정말 수고했어요. 이 말씀이 제가 당신께 드리는 것이 아니길 바라요. 당신 스스로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시길 바라요. 정말 수고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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