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회사를 그만두고 F가 되어간다.

Free도 아니고, Failed도 아닌, 나의 낯선 시작에 대하여 03

by 날다

03. 자유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다 _ 점심이 무의미해지는 시간


퇴사 후 어느 평일 낮 12시.

어느 식당에 혼자 들렸다.


"혼자예요? 아유.. 미안하지만 저쪽이랑 합석하면 안 될까요?

지금 점심시간이라 자리가 없네. 미안해요"


식당 사장님의 미안해하는 말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 테이블의 한쪽에 조심스럽게 합석을 했다.

그 테이블에는 외근을 나온 것 같은 2명의 직장인이 앉아 있었다.

애써 관심 없는 척했지만 자꾸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회사 이야기, 상사의 험담, 후식 커피는 어느 집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


왠지 익숙한 대화들 속에서 문득 회사 다닐 때 나의 점심시간이 떠올랐다.


우리는 사내식당이 있었다.

꽤 잘 나오는 편이었지만, 오랜 세월 그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고 또 어떤 날은

하루 세끼를 먹다 보니 어느 순간 식당의 음식이 지겨웠다.

그래서 동료들과 점심 외식을 하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나는 회사 근처 맛집 리스트를 만들었고 새로운 곳이 생기면 업데이트를 해서 공유했다.

별거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게 참 재미있었다.


매일 아침 동료들과의 대화는 늘 한결같았다.

"오늘 점심 뭐 먹으러 갈까?"

"비 오는데 만두전골과 칼국수중에 뭐가 더 나을까?"


점심시간 5분 전, 팀장님의 눈을 피해 슬금슬금 회사 주차장으로 모인다.

잠시의 탈출.

식사 후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1시가 살짝 넘어간 시간에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 시간은 하루 9시간 이상 회사에 얽매여 있는 나에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가 나는 너무나 불편하다.

합석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여유로운 나의 시간이 문제였다.


퇴사 이후, 점심시간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메뉴 또한 중요하지 않다.

이제 나에게 그 시간은 어떤 특별함도 없고, 소중하지도 않다.

그저 흘러가는 하루의 한 부분일 뿐이다.


회사에 있을 땐 시간을 "업무"와 "성과"로 채워나가야만 했다.

회사는 늘 수치를 요구했고,

그것이 크든, 작든 뚜렷한 결과물이 있었다.

시간을 써야만 했고,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했다.

그것으로 나의 쓸모를 증명해야 했고 일을 했다는 성취감을 갖게 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아무리 무언가를 해도 그것이 "의미 있는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을 비워두는 법 또한 익숙하지 않다.

성과 없이 무작정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이 불안한 것은

회사 밖의 나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흘러가는 12시 점심시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뒤쳐지고 있는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든다.

그리고 그 감정이, 가끔은 나를 서글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