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덴마크로 떠나는 시점을 지금으로부터 6개월 뒤로 잡았다. 그때까지 각자 준비하고 정리할 것들을 적어보니 가장 큰 고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이었다. 이 집은 대출을 받아 마련한 우리 첫 보금자리이며 아내가 인테리어에 공을 많이 들인 small is beautiful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이 집을 정확히 2년만 살 거라고는.
작지만 아름다운 우리의 추억이 가득한 이 집을 기억하기 쉽게 공간 공간을 저장해 본다. 거실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들, 우리가 함께 고른 가구와 타일,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내기를 하며 즐겼던 레트로 오락기, 그리고 밤늦게 귀가해도 항상 반겨주던 어항 조명까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첫 집에서의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그다음은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는 시점이었다. 사실 나에게는 이게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과장 진급을 앞둔 시점이라 내 커리어는 어쩌지 등등으로 생각이 복잡했었지만 막상 아내와 함께 덴마크로 떠날 생각을 하니 이 모든 것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를 언제 그만둘까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어느 날은 회사에 출근하여 바탕화면 왼쪽 구석진 폴더에 숨김파일 되어있던 나의 사직서 문서를 열어보았다. 회사의 불만에 대해 못 참을 때는 당당하게 언제든 제출하겠다던 나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문서였다. 아.. 내가 이 문서를 숨김파일을 해제하고 제출할 날이 오다니 이게 진짜 현실이 맞나. 모니터를 바라보며 그간의 회사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직은 어느 누구에게도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은 안 했지만 덴마크로 떠나는 것이 결정된 이후로 이상하게도 직장상사와 대화에서 가슴속에 눌러있던 묘한 용기가 샘솟으며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미 마음이 떠나서 그런지 하루빨리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나름 책임감이 강한 나였기에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수출건 테스트 과정을 더 이상 내가 진행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 시점에 출장을 내가 다녀오는 것은 너무나도 무책임한 행동이란 판단이 들었다. 이러한 이유와 더불어 덴마크 가지 전에 나름 준비(?)를 할 시간도 필요하기에 가급적 빨리 그만두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만 보면 내 의견을 피력하며 회사에 한치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회사를 언제 그만두지 멘트를 남발하였다.
6개월이나 남았는데 회사를 너무 일찍 그만두는 건 아닌지 눈치가 보이는 시점에 실업급여제도를 확인해 본다. 자발적 퇴사이므로 실업급여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통근 거리 왕복 3시간 넘게 걸리는 조건도 해당된다고 하여 상담 후 6개월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완전 행운이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안도감이란.
다시 한번 말하지만.. 회사를 빨리 그만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음이 떠나서 그런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가장 친한 회사 동료에게만 슬쩍 그만둘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동료의 얼굴에 스치는 복잡한 감정들 - 놀람, 아쉬움, 그리고 약간의 부러움까지 - 을 보며 나 역시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내한테 계속 말했다. 여보, 나 언제 그만두지.
역시 눈치 빠른 아내는
"어차피 실업급여 나오니까 영어회화 공부에 집중하고 가서 무엇을 할지 고민해"
라고 한다. 아내는 내 생각을 읽고 있을 때가 섹시하다.
좋았어!
그 후로 나는 행복한 고민들만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영어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못했던 게임도 하고. 아, 얼마나 행복했었나.
우리가 해외로 떠난다는 소식은 양가 부모님뿐만 아니라 친한 지인들도 알게 되었고, 우리는 해외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틈틈이 지인들과 시간도 가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 가족들과의 마지막 명절 모임. 자리 잡으면 모두를 초대하겠다고 술기운에 외치며 그렇게 아쉬움을 달랬다.
이제 나에게는 회사일만 남았다. 팀장과 상담을 했고 구체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팀에 사람이 부족하고 사실 회사 입장에서 과장급이 퇴사를 한다는 것은 손해 아닌가. 그래도 나 하나 없어도 회사와 팀은 잘 돌아가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드디어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제출하였고 이제 회사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회사에서 소문이 얼마나 빠르냐면 영업소뿐 만 아니라 출장 갔던 베트남 지사 부장님도 카톡이 왔었다. 다들 내가 왜 그만두는지가 가장 궁금했을 터인데. 사실은 저 덴마크 가요.라고 말을 하진 않았고 다들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거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팀장님은 송별식을 나의 바람대로 점심 식사로 대체해 주셨다. 첫 팀장이었고 중간에 팀장이 바뀌고 팀도 바뀌고 다시 팀장으로 만나고 징글징글하고 밉기도 했지만 누구나 생각하듯 옆집 아저씨로 만나면 참 좋은 분이었다. 마지막 점심 자리에서 팀원들과 나눈 대화, 서로의 눈빛에서 읽히는 서운함과 응원의 마음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드디어 떠난다. 나의 청춘으로 채웠던 이곳. 회사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회사 건물을 바라보며, 이곳에서의 모든 순간들 - 성공의 기쁨, 실패의 아쉬움, 동료들과의 웃음과 다툼 - 이 스쳐 지나갔다.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집 정리에 들어갔다. 아내와 나는 해외 정착의 삶이 목표였기에 웬만한 물건은 가져가기로 결심하여 국제 이사를 알아보고 견적도 내보았다. 상당한 금액이었지만 그래도 가서 사는 것보다 낫다고 결론지었는데, 사실 사는 게 더 싸게 먹히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품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그것들에 담긴 추억과 의미들을 되새겨본다.
애지중지 키우던 화분, 총각 때 조금 타고 결혼 후 한 번도 타지 않았던 자전거, 어느 순간 방치된 어항등 그것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특히 처음에는 열심히 키웠던 나의 열대어들. 물관리도 초반에 열심히 해줬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게으름에 수초관리도 제대로 안되고. 미안해. 이 친구들은 어머니 집으로 옮겼다. 가끔 늦게 들어오면 어항 조명 아래에서 열대어들을 바라보면 복잡하고 힘든 생각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 고마운 존재였다.
근데 알다시피 이때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한국도 감염자 수가 늘기 시작했고 전 세계가 패닉에 빠지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덴마크는 확진자가 1명? 정도로 안전한 나라였다. 우리는 다른 것보다도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까 걱정했지만 덴마크란 나라에서 단 한 번도 인종차별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필 코로나와 맞물릴게 뭐야. 지금은 마스크를 벗고 다시 예전 삶을 되찾았지만 이때는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서로를 경계하며 몇 명 이상 모임도 제한되는 정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기였다. 그 와중에 나는 영어회화를 틈틈이 준비했고 정들었던 우리의 소품들을 정리하며 덴마크로 조금씩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일 밤 아내와 함께 덴마크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을 나누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처음 만나 설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