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①여백이 생긴 날

by 해온


여백이 생긴 날이었다.
아무 일도 없던 하루였고,
늘 하던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아이를 보내고
밥을 하고
집을 정리했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장면도,
굳이 적어둘 사건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적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도
하루가 그냥 지나갔다고
말하기에는
마음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아이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다
잠시 손이 멈췄다.
아침에 건네지 못한 말 하나가
그 자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없던 일이 되지도 않는다.
그저
어디에 둘지 정하지 못한 채
하루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는
마음이 자주 생략된다.
괜찮다는 말로 넘어가고,
알겠다는 말로 덮어두며
침묵이 먼저 앞선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는 기대가
오히려 말을 늦춘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에는
그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꺼내면
더 길어질 것 같았고,
오늘은
그냥 지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가 끝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날로
정리될 뻔했다.
하지만
말하지 못한 마음은
그대로 남아
하루의 빈자리를 만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하루의 빈자리를
조금 더 오래 보게 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넘기기에는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여백이라는 말로
불리게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만
이 여백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