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⑤ 여백을 안고 살아가는 법

by 해온


일상 속의 순간들에서
나는 조금씩
여백을 느낄 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여백이 생기면
그 안에서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리하거나,
생각하거나,
의미를 붙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백은
무언가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그대로 두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를 안고 있을 때처럼
여백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기분이 든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게가 있고,
그 무게가
나를 조금 천천히 움직이게 만든다.
하루의 여정이
피곤하고 길어
몸과 마음이 함께 지칠 때면
나는
가슴속의 여백을
조용히 꺼내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이전의 나는
여백을 불안해했다.
조용하면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았고,
멈추면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여백이 생기면
다시 움직이려 애썼고,
다시 채우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여백은
도망치는 시간이 아니라
버티기 위해 필요한
사이의 시간이라는 걸.
여백은
내게 단지
가족을 살피고
아이의 일정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보다
나를 숨 쉬게 하고,
내 마음의 상태를
살필 수 있게 해주는
시간에 가까웠다.
바쁘게 지나가는 하루 속에서도
나는 이제
여백을 밀어내지 않는다.
없애려 하지도 않고,
애써 의미를 붙이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두는 연습을 한다.
하루에 몇 번씩
물을 마시듯,
목이 마르기 전에
여백을 찾는다.
잠깐 멈추고,
지금의 나를 확인한다.
지치지는 않았는지,
너무 앞서가고 있지는 않은지.
이제 여백은
특별한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나로 남기 위해
필요한 호흡이 되었다.
하루를 버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를 지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숨이다.
나는 오늘도
여백을 안고
다시 하루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