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⑥ 여백이 깨지는 날

by 해온


여백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조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던 날에도
여백은
아무 예고 없이 흔들린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날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에
여백은 먼저 깨진다.
아이의 표정 하나,
짧은 한숨,
의미 없이 던진 말 한마디에
가슴속에 품고 있던 여백이
조금씩 무너진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예전의 속도로 돌아가려 한다.
앞서 말하고,
미리 걱정하고,
먼저 판단하려 한다.
여백을 안고 있던 손이
어느새
꽉 쥐어져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아차린다.
여백은
늘 단단하게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키려 애쓰는 동안에도
쉽게 금이 가고,
순식간에 흘러내린다.
그래서 나는 가끔
여백을 잃어버린 것 같아
당황한다.
그날의 나는
조용하지 못했다.
숨을 고르지 못했고,
말을 줄이지도 못했다.
괜찮다고 넘기려다
마음을 먼저 들켜버렸고
여백은
그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이전 같았으면
그걸 실패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여백을 지키지 못한 날,
다시 무너진 날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여백은
한 번 배우고 끝나는 태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되돌아가고
다시 익혀야 하는 감각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백이 깨진 날에도
하루는 흘러간다.
아이의 하루는
아이의 방식으로 지나가고
나는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온다.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조금 흐트러진 채로.
그날 밤
나는 다시 여백을 찾는다.
이미 깨어진 여백을
원래대로 돌리기보다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바라본다.
어디서 급해졌는지,
어디서 놓쳤는지.
여백은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자리라는 걸
그제야 이해한다.
그래서
여백이 깨지는 날도
나는 기록한다.
여백을 잃은 날이 아니라
여백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로.
오늘의 여백은
조금 흐트러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다시 숨을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