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④ 여백 안에 아무도 없었다

by 해온


여백이 생기면
그 안에서
나를 만나게 될 줄 알았다.
조금은 가벼워지고,
조금은 또렷해진 얼굴로
나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여백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했고,
비어 있었고,
기대했던 장면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가족 쪽에 있었다.
아이의 시간표를 먼저 떠올리고,
다음 끼니를 계산하며
내 하루를
다른 사람의 필요에 맞춰
접고 있었다.
여백이 생겼는데도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기보다
그 자리에
그대로 묶여 있었다.
이상했다.
여백은 분명히 있었는데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건
나라는 사람보다
역할의 감각이었다.
엄마,
워킹맘,
집안일을 책임지는 사람.
그 이름들은
정확했지만
나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나는 여백 속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은
잠시 멈췄을 뿐
사라지지 않았고,
관계의 무게는
여전히
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가끔은
이 상태를
희생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무 과장된 말 같고,
그렇다고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넘기기에는
내가 너무 많이
빠져 있는 것 같아서.
여백은
나를 비워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역할로
살아왔는지를
또렷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나는
여백 속에서
나를 찾지 못했다.
대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나의 자리를 보았다.
비어 있지 않아서
더 답답했던 자리,
그러나
이제는
외면할 수 없게 된 자리.
여백은
답을 주지 않았다.
다만
질문을 남겼다.
나는
이 상태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을 안고
나는
다음 여백으로
천천히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