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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 노을 Feb 10. 2023

진화의 변주곡

날고기의 합목적성과 포스트-디스코스

채플린의 <서커스>는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즉 ‘웃픔’을 다룬다. 그의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이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핵은, 희극과 비극의 배우는 채플린이요, 관객은 채플린이 아니라는 점이다. 희극과 비극을 논하는 카페 속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그들 얘기는 절대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입에 들어가 역겨운 구취를 맡아야 하는, 혀에 낀 설태를 보아야 하는, 이빨에 끼어 빠져나올 수 없는 자들이, 또 다른 곳에서 그들 얘기를 절대 하지 않는 카페 속 사람들임을 아는 것은,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 주변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뒷담화는 진화의 산물이라지만, 진화도 인간이 만들고, 산물도 인간이 만든 마당에 뒷담화의 진리성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용어로 보장될 수 있을까?      


육회를 먹으면서, 회를 즐기면서, 우리는 날 것의 미학을 배우다. 생물을 날로 먹다가 인생까지도 날로 먹고 싶어지는 우리다. 그러면서 문득, 왜 육식동물이 이족보행을 하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공상적 가설은, 날고기를 먹을 수 있는 존재가 최종 진화형이라는 것. 그들은 이미 진화한 것이다. 인간은 아직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뒷담화는 담화다. 담화는 맥락을 형성하고, 허구성을 반영하여, 쓸데없는 말을 쓸 데 있는 것으로 포장하는 인간들의 계략이다. 인간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담화의 종말이 도래해야 한다. 

오거라, 포스트-디스코스(post-discourse)여!     


<매트릭스>의 충격적 장면 중 하나는 ‘네오’의 입-없어짐-순간이다. 인간에게 입이 없는 것은, 눈이 없는 것보다도 생각하기 어렵다. 코로나19가 인간을 위협하는 이유는, 입이 사라지는 진화의 순간을 앞당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입이 없어지고, 말이 없어지고, 담화가 없어지는 것은 사회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로의 도래. 비가시적 언어에서 가시적 언어로의 도래. 레트로의 반향은 끝나지 않는다. 

<바빌론>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변혁에서 발생한 몰락을 보여준다면, 지금 사회는 유성영화가 다시 무성영화가 되는 회귀의 축복을 보여준다. 이 회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퇴보한 아담으로의 이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반쯤 신학적이고 반쯤 미(狂)학적인 가설이 실제가 되게 하는 것 역시 담화이다. 진정한 진화는 모든 담화가 사라지는 순간, 시작된다.      


하지만 입이 사라지는 것이 기겁할 일이며 진화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면, 지금 새로운 전략을 세워볼 수도 있겠다. 남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상황을 처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씨부리는 뒷담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 뒷담화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대화에서 발생하는 장벽을 마주한다. 

남 얘기만 실컷 하던 사람들이 “나는”을 외치는 순간, 그 뒤에 오는 말들은 정해져 있다. 

“집에 가야 해”, “다른 곳에 가야 해”, “할 얘기가 없어”. 이렇게 담화는 사라진다. 


담화가 사라진다면, 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된다. 남자의 젖꼭지처럼 말이다. 남자의 젖꼭지가 절반의 확률로 그 존재가 확정되었다면, 우리의 입은 절반의 확률로 그 부재가 확정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밥은 어떻게 먹는가? 입으로 숨을 쉴 수는 없는 것인가? 밥이야 콧구멍으로 먹으면 될 테다. 숨은 피부로 쉬면 될 테다. 영양 과잉과 신선함 부족의 사회에서 영양소 섭취와 호흡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겠는가? 입이 사라지고 코로 숨을 쉬고 피부가 변형된다면, 귀와 눈도 변형되어야 한다. 만물에게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는 신유물론적 인간은 그들의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귀는 대폭 커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괴상망측한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은 너무 슬프다. 가만히 있는데, 입은 없고 귀는 코끼리의 그것처럼 커지다니 말이다. 이런 눈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하나, 눈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변형된 모습과 변형되지 않은 모습 간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둔한 자들에게 당할 것이다. 자연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눈 없는 자들은 멸종한다. 눈은 외연상 그대로이다. 그들의 감각은 굉장히 둔하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시는 죄악이다.    


냉동인간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입 없는 인간을 마주한다. 코로 홈런볼을 먹으면서 피부로 숨을 쉬고, 담화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을 듣기 위해 귀가 굉장히 커진, 그런 인간을 마주한다. 냉동인간은 그를 짐승이라고 부를 것이다. 진화한 인간은 냉동인간을 짐승으로 부를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진화에 성공한다.

서로를 해치지 않은 채 말이다.      


하지만, 그때도 날고기가 남아 있을까? 


젠장. 진화하고 나서 깨달았다. 진화의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을. 


그래도 낙담은 말자. 웃픔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는 순간, 새로운 진화가 시작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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