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idnightBlue
Apr 28. 2024
봄꽃을 사다
실로 오랜만에 꽃을 품에 안아본 날
사람의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빨리 긴다. 내 머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디게 기는 편이라 생각해 왔고 심지어 하루가 다르게 쑥쑥 머리카락이 자라는 사람들을 보며 진심으로 부러워하기도 했었는데, 오늘 바라본 미용실 거울 속의 나는 내 기억보다 훨씬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분명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는 거울 속의 나일진대, 문득 새로이 느껴진 것은 왜였을까. 어쨌든, 둘째의 머리카락을 자르러 간 미용실에서 디자이너 언니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다듬은 머리는 기대보다 마음에 들었다.
단둘이 나온 길이라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갖기로 했다. 서브웨이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 하여 근처 가게를 검색하고 있노라니 둘째가 말한다. 우리 동네 말고 조금 멀리 있는데 가보고 싶다고. 녀석, 드라이브라도 즐기고 싶은 모양이다 싶어 차로 한 20분 정도 떨어진 옆동네(라 하기엔 터널도 타야 하고 강도 건너야 하지만)로 향했다.
도착한 동네는 많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아주 예전의 초기 신도시였던 곳이다. 굳이 방문할 일은 없는 곳이기에 나로서도 오랜만에 들른 곳인데, 목적지를 찾아 차를 몰다가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 일주일에 두어 번 이 동네의 한 요가 스튜디오에서 핫요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당시 직장과 우리 집 사이에 이 동네가 위치해 있었다. 그때 나는 햄스트링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알았고, 내 햄스트링이 짧은 편이라 다리가 덜 유연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유연하지 않은 대신 근력은 봐줄만해서 요가 수강생으로서는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던 나였다.) 오늘 방문한 이 동네의 느낌은 내 최근 기억 속 모습보다 조금 더 정돈되었고 건물과 상가는 많아져 번화한 느낌인 한편,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근처 동네 주민인 듯 편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적당한 건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밖으로 나오자 탕후루 가게, 마라탕 가게, 크고 작은 카페, 치킨집, 고깃집, 분식집, 안경점, 해장국집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상가 모퉁이 길에 작게 위치한 꽃 가판이었다. [한 다발 오천 원]이라는 손으로 쓴 피켓이 꽂혀 있는 계단형 가판에는 종류가 많진 않지만 꽤 알록달록 다양한 구성의 꽃들이 놓여 있었다. 장미, 튤립, 프리지어, 안개꽃, 그 외 내가 모르는 꽃들까지. 분명 나는 이 동네를 향해 차를 몰고 달려오며 길가에 흐드러진 벚꽃이며 고가도로에서 보이는 산 중턱 개나리를 보며 아이와 함께 예쁘다고 감탄했건만, 도심 속 가판에 놓인 꽃을 보자 왜 또다시 예뻐 보이며 못 견디게 사고 싶어 졌을까. 어쩌면 산뜻한 봄의 기운을 집안에 들여놓고 싶어서, 아이에게 가끔 꽃을 사는 기쁨을 알려 주고 싶어서, 세상에는 생필품은 아니지만 이따금 구매했을 때 삶이 보다 부드러워지고 풍성해지는 아이템이 있다는 걸 되새기고 싶어서, 또는 이번 달에 내 생일이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나를 위해 꽃을 샀다. 아니, 작은 두 다발을 샀으니 하나는 나를 위해, 하나는 아이를 위해 샀다고 포장하고 싶다. 꽃을 사자는 생각은 지출권을 가진 내가 했고, 고르는 건 아이에게 맡겼으니. 나라면 꽃을 고를 때 엄청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은데 아이는 큰 망설임 없이 보라색 프리지어를 골랐다. 진보라색과 연보라색이 섞여서 예쁘고, 작은 봉우리가 많아 앞으로 더 많이 필 것 같아 골랐다는 야무진 이유를 붙이며. 계산을 끝낸 후 꽃을 받아 드는 아이의 얼굴에도 귀여운 미소가 번진다. 집에 빨리 가서 물에 꽂아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는 한편 조심스레 냄새도 맡아본다. 나에게도 내미는 작은 다발에선 아이의 따스한 체취와 섞인 싱그러운 향기가 번진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 식탁에는 보라색 프리지어가 꽂힌 꽃병이 놓이게 되었다. 이 작은 꽃병이 뭐라고,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시원한 물을 잘 갈아주며, 시든 꽃은 잘 떼어주며, 작은 봉우리들이 남김없이 모두 꽃을 틔울 수 있도록 잘 지켜줘야겠다. 마지막으로 꽃을 받거나 산 기억마저 희미해진 지금, 그래도 2024년 4월에는 내가 작은 꽃다발을 품에 안았구나 하는 기억을 남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