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멋있게 쓰고 싶은 마음
이런 기념일이 되면 SNS의 선물하기 기능이 참 편리하다. 누가 생일인지도 친절히 알려주고, 선물이 고민될 때 추천도 해주고, 실제로 선물을 보내 주기도 하니 말이다. 덕분에 이번 생일에도 친구, 지인, 동료들로부터 과분한 선물을 많이 받았다. 배송지를 입력하고 내가 실제로 받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리는지라, 아마 다음 주 출근을 하면 회사로 선물들이 도착해 있을 듯하다. 아이템들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속절없이 두근대는 마음.
소중한 사람에게 직접 받은 선물, 그러니까 제일 처음으로 손에 쥔 이번 생일 선물 중에는 만년필이 있었다. 예쁘게 내 이니셜이 각인까지 새겨진 만년필은 잠시 잊고 있었던 글씨 쓰는 감성을 새삼스레 상기시켜 주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만년필이라는 필기구는 나에게 조금은 더 특별한 추억이 담겨 있었다.
때는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식 날. 생전 기념일을 챙겨 주거나 직접 선물을 건네주시는 일은 드물었던 무뚝뚝한 아빠가 나에게 졸업 선물로 만년필을 하나 주셨다. 까맣고 고급스러운 상자에 곱게 싸인 묵직한 만년필은 Pilot 사의 것으로, 펜촉 끝으로 잉크를 빨아들여 보충해서 쓰는 형식이었다. 처음 가져본 만년필에, 처음 써보는 필기감에, 어쩐지 멋있는 어른이 된 것만 같아 근사한 기분이 들었다. 선물 받고 나서 괜히 이것저것 베껴 써보고 그려 보느라 금세 잉크 반 통 가량을 썼던 생각도 난다. 성인이 되고, 좀 더 넓은 배움을 위해 대학에 가는 딸내미를 위하여 아빠는 만년필을 주셨던 것일까. 가타부타 말씀은 없었던 선물 증정이었던지라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빠의 마음을 어림짐작 해보며 한동안 소중하게 썼었다.
그 만년필의 행방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묘연해지고(아마도 아직도 부모님 댁 어느 서랍 속에 있을 것 같지만) 제대로 된 글씨를 쓰는 일조차 드물어진 요즘, 생일 선물로 덥석 받아버린 만년필은 기쁨과 동시에 약간의 당혹감도 선사해 주었다. 이 좋은 만년필을 내 글씨체가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초라한 기분. 그래서 잠깐 인터넷을 뒤적이며 만년필에 어울리는 글씨체를 눈에 익혀본 뒤 연습을 조금 해보았다. 마치 캘리그래피를 하는 느낌으로 말이다. 어떤 블로거가 필사를 시작하며 썼다는 글 중에 나태주 시인의 시 글귀가 있기에 따라 적어 보았는데, 그 내용 또한 흘러내리는 듯한 글씨체와 퍽 어울려 첫 작품감(?)으로 골라 보았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확실히 감성적인 재미는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생이던 시절의 나처럼 잉크 반 통을 다 쓸 열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틈틈이 쓰고 연습하리라 생각하며, 조금 더 자주 써볼 곳은 없을까 고민해 본다. 회사에 가지고 가서 업무수첩에 글을 끄적일 때 쓸까 생각하니, 만년필로는 글씨 쓰는 속도가 영 느려 안될 것 같고, 결재 서류에 멋들어지게 서명을 할 때 쓸까 하니, 나는 결재권자도 아닐뿐더러 요즘은 전재결재 시스템을 쓰기에 펜으로 휘갈길 일도 없다. 글씨 쓰지 않는 사회라니! 어쩐지 인간 문명의 퇴행과도 같이 느껴져 약간은 슬퍼지지만 유사시를 위해 가방에 늘 넣어 다녀 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보며 펜 뚜껑을 닫았다.
언젠가는 이 만년필에 부끄럽지 않을 멋진 글씨체를 가질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