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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dnightBlue May 12. 2024

향기의 어려움

향을 만들어 보니 느끼게 된 점

우연히 좋은 기회가 생겨 향수를 만들어 보게 되었다. 회사에서 진행한 행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가게 된 원데이 클래스였다. 맑고 쨍한 대낮에 찾아간 바다 근처 아뜰리에의 주인은 몇 년 전 퇴직하신 분이었는데, 어쩐지 살짝은 찌들어 보이는 우리와는 다르게 첫인상부터가 뭔가 여유롭고 밝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서비스직 특유의 그 분위기, 비슷한 원데이 클래스를 다년간 진행하며 쌓인 여유겠지만.


일일 강사님은 본인을 이렇게 소개한다. 사실은 회사에 다닐 적부터 향수나 아로마테라피 등에 관심이 많았고, 향수를 자주 뿌리고 다녔다고. 한창 진한 향기에 빠져 있었을 땐, 출근하면 특히 남성 동료들이 자기 가까이 오지 말아 달라고 청했을 만큼 온몸으로 향을 뿜고 다녔었다고. 그러다가 퇴직을 하게 되고, 좋아하고 잘하는 걸 찾다 보니 공방을 차리게 되신 듯했다.


나는 코가 상대적으로 예민한 편이라 독하고 진한 향은 선호하지 않지만, 내 취향에 맞는 향수는 종종 사서 뿌리거나 소장하고 있다. 한동안은 새 향수를 사지 않아 하나를 구매해야 하나 어쩌나 하던 타이밍에 향수를 만들게 된 거라 잔뜩 기대감을 안고 진지하게 임했다.


원래는 2시간이 넘게 걸리는 클래스라지만, 빨리빨리에 익숙한 현대 직장인들은 1시간 남짓으로 끝내 달라 재촉했고, 강사님은 (전) 직장동료들을 충분히 배려하여, 각종 사전 준비는 전날 새벽까지 미리 해두셨단다. 시향지에 향수 이름을 적는 것, 각종 향기에 대한 느낌을 미리 예시로 적어두는 것 등을. 요즘은 워낙 니치 향수다 뭐다 해서 고급스럽고 특색 있는 향수들이 많다 보니, 30여 종이 넘는 향수의 향들을 시향 하여 본인에게 맞는 향을 찾고, 두세 가지 정도를 블렌딩 하여 최종 DIY 향수를 만드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아는 향도 있고 모르는 향도 있고, 뿌렸을 때의 첫 느낌이 좋은 향이 있는 반면 시간을 두고 깔리는 잔향이 좋은 향이 있고, 몇 가지의 향을 연달아 맡다 보니 머리가 이내 아득하며 살짝 어지러워진다. 그럴 때엔 바깥에 잠시 나가 야외의 공기를 맡으며 코를 쉬게 해 주거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커피콩을 잠시 코에 대어 그 구수함으로 코를 정화시켜야 한다.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바로는, 사람 코는 연이어 3-4가지의 냄새를 맡으면 그 뒤로는 무슨 향이든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후각신경이 일시적으로 마비된다고 하던데 그런 것이었나 보다.


조말론, 딥티크, 샤넬, 디올, 톰포드, 바이레도, 탐다오, 르라보, 크리드, 에르메스, 구찌, 겐조, 지미추, 아쿠아디파르마, 펜할리곤스, 존바바토스... 넘쳐 나는 향들 속에 내가 향수인지 향수가 난 지, 내가 좋아하는 향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이게 나에게 맞을 것인지 혼돈의 카오스를 겪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 향기라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잖아!?"


그렇다. 이를테면 수업의 도입부에 강사님이 나에게 어떤 향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예전엔 상큼한 과일 향이나 꽃향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잔향이 조금은 우디 한 계열의 향이 괜찮더라고요."라고 대답을 했지만 이건 말로만 들어서는 무슨 향인지 도통 모를 일이다. 반대로, 어떤 향수를 맡았을 때, 그 향을 말로 표현하기도 상당히 어렵다. 요즘 사무실에서 뒷자리 후배가 책상 위에 두고 뿌리는 조말론의 '블랙베리 앤 베이' 향은 평소에 내가 좋아해서 하나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이 역시 맡았을 때 어떤 향이다라고 표현하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어쩐지 패션잡지나 하이엔드 브랜드 잡지에 나올 법한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고 무슨 말인지도 모를 영어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섞어가며 표현해야지만 겨우 감을 잡을락 말락 할 만큼.(이를테면, 하나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상당한 한계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 언어실력이 짧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아, 그래서 강사님이 나누어주신 A4  종이에 각 향수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각각의 아래 내 느낌을 적어보는 칸이 있었구나. 물론 우리 불량 수강생들은 느낌을 꼼꼼히 적기보다 바로 다음 향을 맡아버리기 바빴지만.


그렇게 해서 아주아주 힘들지만 간추린 느낌만을 표현해 보자면 내가 선호하는 향은 대략 이랬다.

1) 이른 아침, 숲 속을 거닐면 맡을 수 있는 이슬에 젖은 풀 냄새

2) 언젠가 혼자 오른 산속 깊은 곳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 있던 높은 삼나무들 사이에서 느낀 나무의 껍질냄새

3) 따뜻한 생강레몬차에서 나는 너무 가볍지 않은 상큼한 냄새

4) 튤립이나 백합을 갓 안았을 때 나는 정갈한 꽃 본연의 냄새


어렵다. 조향사에게 저렇게 설명을 해서 향수를 추천받는다 해도, 꼭 취향에 들어맞는 향은 없을 것이다. 향기란 그만큼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다양하고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내가 기억하는 향도 본연의 향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만들어지고 이미지화된 형상일지도 모를 일이고. 마치 생 블루베리 과일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블루베리맛이 나지 않듯이.


그렇게 어려움을 가득 안고 어찌 저찌 나만의 향수를 만들었다. 참 재밌는 것은, 똑같은 향수 종류를 가지고 블렌딩을 해도 각 향의 비율에 따라 상당히 다른 느낌의 완성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향수는 한 달 정도 숙성을 시키고, 때때로 흔들어서 향들이 잘 섞이게 해 준 뒤에 써야 한단다. 맨 마지막으로는 만들어진 향수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이는 시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역시 그 과정은 쿨하게 패스해 버린 우리였다. 그래서 아직도 화장대 위 내 향수는 무명 씨다.


무명의 향기. 어쩌면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이름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 달 뒤에 봅시다, 무명의 향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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