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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주 Apr 12. 2021

소싯적 보안사 직원 관련한 기억들(2)

담당하는 부서 직원들의 동향도 체크하는 게 그들 임무

1980년대 초 전직 ‘보스’를 대통령으로 둔 국군보안사령부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2·12 쿠데타의 연장선에서 1981년 3월 제5공화국의 태동 밑그림까지 주도한, 신군부 권력의 산실이자 핵심이었으니까. 따라서 중앙정보부조차도 5공 출범 직후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되면서 속칭 ‘끗발 1위’의 자리를 보안사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최고 권력자의 전폭적인 신임을 등에 업은 보안사는 군 내부는 물론 민간 영역에까지 암암리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적어도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행각을 폭로해 국민 분노가 폭발하기 전까지는. 

현재도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엔 군의 제반 프로젝트 수행에 ‘보안성 검토’라는 절차가 있었다. 정보의 외부 공개에 문제는 없는지 등을 확인하는 일종의 검열작업인데, 보안사가 군부의 제반 동향을 감시·견제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통령 하명’을 받아 시작된 새 군가 제작사업은 보안사 산하의 국방부 담당인 100보안대가 파악해야 할 주요 업무 중 하나였음이 분명했다. 군가 제작 주무 부서인 정훈국의 사업 진행상황은 물론 관련 인원의 동향 등은 보안성 검토 의뢰와 무관하게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국방부 정훈국 송년회 때 문화홍보과 직원들과 "위하여!"

나의 ‘인적 동향 정보’도 보안사 직원이 체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건 군가 제작사업 이후였다. 1981년 7월 새 군가의 대통령 결재를 마치면서 중위로 진급했고, 파견 만료 시점인 그해 11월 결혼과 동시에 국방부 파견에서 전속으로 전환됐는데…. 주한미군 관련 홍보업무를 수행하던 해군 소령의 전역을 앞두고 마땅한 후임을 못 찾은 정훈국에서 날 적임자로 점찍어 단행된 인사조치였다. 대통령과 동기인 육사 11기 정훈국장(육군 소장)이 직접 공군본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파견 종료 원대 복귀’가 아니라 ‘현 위치 전속’을 요구한 인원이니 보안사의 담당 직원도 동향을 챙긴 것으로 짐작된다. --(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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