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은 피난고지였다.

by 기추구



피난고지



내가 태어난 곳은 피난고지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강원도 횡성에서 사셨는데, 해방이 되고 6.25가 나기 전에 난리를 피한다고 산속으로 숨어 드셨습니다. 그곳이 소백산맥 단양쪽 막다른 골목 샘골입니다. 15년 후에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샘골에서 도솔봉을 넘으면 바로 강원도와 충북을 남쪽으로 지나 경북으로 가는 죽령이 있습니다. 죽령은 지금도 전국에서 터널이 제일 긴 죽령터널이 있고, 철길도 똬리굴이라고 높은 산을 한 바퀴 돌아 올라가야 넘을 수 있듯이, 당시도 가장 높은 고개 중에 하나였습니다. 죽령에서 우리 동네를 가려면 도솔봉을 지나야 하니 갈 엄두도 못 내고, 갈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샘골에서 서쪽으로는 예천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단양에서 남천 가는 길의 2/3 쯤 갈림길에서 오른 쪽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면 됩니다. 지금도 지형을 따라 꼬불꼬불 2차선으로만 닦여 있을 뿐이니, 당시에는 오솔길 풀을 헤치고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였을 것입니다. 일부러 마음먹고 찾아가지 않으면 오기 힘든 곳이 샘골이었습니다.


동네는 가마솥형태의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장정을 시계 바늘이 꽂힌 듯이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가마솥을 반쯤 올라가 한 바퀴 돌듯 여섯 동네가 있습니다. 가운데 동네 장정은 그래도 많은 성씨가 섞여 있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정착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곱 동네 중에 가장 평평한 곳도 가운데 동네 장정뿐입니다. 장정에서 정남쪽을 바라보고 선다면, 12시 방향에 내가 태어난 샘골입니다. 맑은 샘이 나는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샘골이 일제를 거치면서 한자로 동네이름을 바꿀 때 남천, 남쪽에 있는 샘동네로 바뀌었습니다. 샘골은 조씨의 집성촌입니다. 한 시 방향으로는 남조인데, 옛 이름은 가리점입니다. 남조는 박씨뿐입니다. 세 시 방향은 신구입니다. 여기는 장씨의 집성촌입니다. 다섯 시 방향은 덕촌인데 여섯 마을 중 가장 작은 마을입니다. 여섯시 방향은 미노입니다. 미노는 이씨가 많이 살았고 있습니다. 샘골이 가장 깊숙한 골짜기라면 미노는 가운데 마을인 장정을 들어가는 들머리인 셈입니다. 단양에서 미노에 들어가 덕촌을 거쳐 가마솥 바닥인 장정에서 각 마을로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열시 방향으로는 사동이 있습니다. 사동은 절이 있었는지 절골이라고도 불렸는데, 이씨가 대부분이었고 다른 성은 배씨 한 집 뿐이었습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가자면 가장 편한 길이 장정으로 나왔다가 다시 방향을 잡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산판길이 나 있어 그래도 넓고, 명절 때나 시사 때 일 년에 두어 번 길을 손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로 옆 동네끼리는 논두렁 밭두렁 길로 다닐 수는 있지만 농사일이 아니면 특별히 다닐 일이 없습니다. 동네 마다 마실이라면 자기 동네에서 충분하고, 볼일은 가게도 있고 농협도 있고 학교도 있는 장정으로 나오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동네로 바로 갈 수 있는 큰길이 나 있는 동네가 샘골과 남조입니다. 샘골은 장정에서 12시 방향 정남향에 있는데, 중간쯤에 남조와 갈라지는 길이 있습니다. 남조와 샘골, 남천은 가장 이웃한 동네입니다.


샘골은 조씨의 집성촌이었습니다. 약 40호가 산비탈에 소똥처럼 붙어 있습니다. 권씨가 두 집, 백씨가 한 집, 조씨 중 한 집의 처가인 전씨가 한 집, 우리 집안인 김씨가 세집이고, 일곱 집을 뺀 나머지는 모두 조씨입니다. 그 때까지 조씨 집안이 가풍을 지키면서 집성촌을 유지했는데, 개중이 다른 성씨가 들어온 것은 우리처럼 대부분 난리를 피해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4남 1녀를 두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고모인 맏이이자 큰 딸이 시집을 갔는데, 시아버지가 지세를 볼 줄 아는 지관이었습니다. 옛날 문서를 연구하고, 소문을 수합하고, 직접 돌아다니면 지세를 파악한 결과, 가마솥 형상을 닮은 장정분지가 적격이었답니다. 소백산 줄기를 넘는 고개가 험하고, 험한 고개인 죽령고개와 예천고개의 사이에 있어 찾을 일이 별로 없고, 찾으려 해도 가마솥 형상의 분지를 들어오려면 분지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수도 없이 구불거리도록 가로막는 산자락을 여러 번 휘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통이 없는 천을 휘휘 돌려 갈무리한 치마폭과 같습니다. 사돈이 난세를 직감하고 살길 찾아 피난고지로 가자는 말에 할아버지는 식구들을 이끌고 가장 깊숙한 동네인 남천으로 이사를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웬 걸. 정작 6.25 때는 인천상륙 후 인민군들이 양쪽 고갯길이 뻔한 길이라 그 길로 못가고 가운데로 지나가야 했습니다. 낙동강으로 공격할 때는 양쪽 고갯길로 가서 난리를 피했는데, 돌아서 후퇴할 때는 인민군이 지나는 통로가 되어 피난고지가 도리어 난리고지가 되었습니다. 그 후 할아버지의 사돈은 여기를 떠나고, 할아버지는 눌러 앉으셔서, 여기서 내가 태어난 것입니다.




집짓기


남천은 생김이 소 안장을 앞으로 좀 기울여 놓은 것 같습니다. 가운데 등줄기가 뒤에 산 능선에서 앞으로 스피카가 세워진 앞산까지 이르고, 그 양쪽으로 비탈 아래까지 집들이 늘어져 있습니다. 한 집에서 옆으로 길을 나오면 가운데 개울까지 이르는데 거기서 방향을 조금만 바꾸어 돌아 아래나 위로 향하면 이웃집이 되는 식입니다. 아이들 장난감으로 개미집의 형태를 관찰하려고 유리판을 사이 띄워 붙이고 그 사이 톱밥을 넣어 개미가 집을 짓는 모습과 똑같다. 그러고 보면 개미의 생태와 인간이 생태는 크기가 다를 뿐 똑같아 보입니다.


할아버지네 집은 안장 맨 앞쪽 끝부분 가운데 있었습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큰작은아버지와 사셨습니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아직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았습니다. 마당에서 돌로 된 계단을 세 개 올라가 내가 걸터앉으면 발이 달랑 들리는 높은 대청마루 너머로 방이 4개 차례로 늘어있는 집이었습니다. 왼쪽으로는 안방인데 그 앞에 부엌이 달려 있고, 가장 오른쪽에는 할아버지 방이었는데 그 앞에 소죽을 쑤는 큰 가마솥이 걸려 있는 사랑방입니다. 그 사이에 방 하나는 작은작은아버지(당시는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삼촌이다) 방이고, 또 하나는 광으로 쓰는 방입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집의 맞은편에는 외양간이 있습니다. 사랑방 앞에서 소죽을 쑤어 마당가를 가로질러 대여섯 발자국이면 통나무로 깎아 만든 소죽통에 막 익은 소죽을 쏟아 부어 줄 수 있습니다. 외양간 옆에 대문이 달려 있습니다. 대문의 지붕과 외양간이 지붕이 이어져 있으니까 위에서 보자면 집 두 채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형태입니다. 대문과 큰작은아버지네 부엌을 잇는 마당 끝은 싸리울타리이고, 반대쪽 마당가로는 한길도 더 넘는 담장 위로 이웃집 마당이 됩니다.


큰집은 안장 가운데서 조금 오른 쪽으로 내려가 개울가에 있었습니다. 큰아버지는 살림을 난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소도 한 마리 없습니다. 세 칸이 일자인 집입니다. 안방과 그 방향 끝으로 딸린 부엌이 있었고, 방에서 부엌 반대편으로 사랑방이 있고, 사랑방의 아궁이는 기둥을 두개 세워 이엉만 짧게 달아 올렸습니다. 집 뒤로 안방굴뚝과 사랑방굴뚝이 나란히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의 집은 방대방향 고만큼 거리에 있었습니다. 큰 아버지가 살림 날 때 새로 집을 지었듯이, 우리 아버지도 장가를 들어 집을 새로 지어 살림을 나셨습니다. 남의 집 마당이 끝나는 곳에 터를 잡아 지은 방 한 칸 부엌 한 칸, 단칸방이었습니다. 고구마처럼 길쭉한 땅 가운데 도톰한 곳에 집을 세우고, 좁은 한 쪽은 장독을 몇 개 두고, 반대쪽 좁은 곳이 집을 드나드는 길입니다. 소를 키우는 외양간은커녕 마당이랄 것도 없는 작은 터였습니다. 여기서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습니다.


내가 학교에 들어 갈만큼 되었을 때, 그러니까 남동생이 둘 더 태어났을 때, 동네 반대편 끝에 우리 집을 새로 지었습니다. 할아버지네 집에서 큰집을 지나, 또 그만큼 옆으로 가서 동네 가장 오른쪽 끝 돌작밭 귀퉁이 땅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동네 사람들이 나무를 져오는데 아주 생나무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생나무라면 그렇게 지고 다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베어 놨다가 마른 다음에 가져오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도 상감이 온다고 쉬쉬하면서, 발걸음도 조용조용, 땀만 뻘뻘 흘리면서 져 날랐습니다. 아직 6.25전쟁 직후라서 산업이 활기를 찾기 전이라서 산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산이 깊어 포탄이 떨어지지는 않아서 그나마 보존된 산이라고 해도 나무를 베다가 상감한테 걸리면 감옥에 간다고, 사동에 누가 나무를 베다가 감옥에 갔다 왔는데 거지반 다 죽게 생겼다고, 집 한 채 짓는데도 온 동네가 비밀을 지켜 주어야 했습니다.


집을 짓는 일은 참 오래 걸렸습니다.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다 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갈무리해야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남천으로 오는데 개울을 사이에 두고 양쪽의 산자락이 앞치락뒷치락 겹치듯이, 또는 집들로 들어가는 길이 개미집처럼 지그재그로 뒤섞여 아래치락위치락 쌓이듯이, 이런 일 저런 일 여러 가지 일을 섞어 쳐야 하는가봅니다.


집을 짓는 데는 동네 사람이 많이 와서 일했습니다. 봉당을 쌓고, 그 위에 기초돌을 땅에 박아 다지는 데도 몇날 며칠이 걸렸습니다. 먹줄을 놔서 다듬고 홈은 파고 맞 끼워 기둥과 보를 세우고는 도리를 돌렸습니다. 가는 나무로 중간을 세우고 싸리나무로 가로 엮어 벽의 골을 만들었습니다. 흙에 볏짚을 넣어 이겨 벽 골의 앞뒤를 싸발랐습니다. 지붕은 벽 골을 더 촘촘하게 해서 흙을 덮은 다음 석가래를 건 위에 싸리나무를 엮어 덮고 이엉을 얹었습니다. 이엉의 마무리는 영마루를 얹는 것입니다. 부잣집 권씨네 흙 담장 위에 얹었던 것과 같은 모습을 돌돌 말아 올려서, 양쪽에서 이어온 이엉의 가운데 펴서 덮고, 말을 타듯 타고 앉아 이엉과 마주 엮어 꼬부려 넣으면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을 거 같았습니다. 새집 냄새는 참 좋았습니다. 흙냄새 나무냄새였습니다. 우리 집은 봉당도 있고, 마당도 이전보다는 꽤 넓었고, 외양간과 헛간 옆에 뒷간도 있는 ㄴ자 집이었습니다.


새로 지은 우리집은 안장의 오른쪽 맨 위라서 산 아래가 까마득히 보이고, 장정으로 내려가는 커다란 계곡을 건너질러 비슷한 높이에 신구의 뒷동네 몇 집이 한 줄로 붙어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마루에 앉으면 머리 들어 하늘이 1/3이 보이고, 정면으로 남조 뒷산이 1/3이 보이고, 고개를 조금 숙이면 앞집과 우리 마당이 나머지로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