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가는 길
산동네 남천은 농사를 짓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산을 내려 온 장정에는 학교도 있고, 교회도 있고, 가게도 있고, 농약을 살 수 있는 농협도 있고, 하루에 두 번씩 들어오는 버스를 타고 읍내를 나가는 정류장도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일에 필요한 볼일은 대부분 장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장정을 가려면 가는 길은 모두 내리막길입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반대로 모두 오르막입니다.
요즘 같은 봄에 내려오는 길은 참 즐겁습니다. 온갖 꽃들이 다 피어 있습니다. 봄에 가장 일찍 피는 꽃은 진달레입니다. 참꽃인데, 내가 어릴 때는 창꽃이라고 불렀습니다. 참꽃이라고 뜻을 안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입니다. 창꽃은 이름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맛은 좋았습니다. 내 키보다 큰 나무에 지천으로 핀 것을 보면 뛰어들어 안겨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학교 마치고 점심을 굶은 채로 집에 가다가 참꽃을 만나면 우선 한 움쿰씩 입에 따 넣기 바빴습니다. 아직 많이 없을 때는 먼저 간 사람이 ‘이거 내꺼’하고 맡아 놓으면 얼른 더 들어가 따먹어야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맡을 필요가 없어지도록 지천으로 널린 것이 참꽃이었습니다. 한 가지 위에 대여섯 송이씩 뭉쳐 있어서 따 먹기도 좋았습니다. 잎은 없고 꽃만 있으니 골라낼 것도 없이 한 손은 입으로 가고 다른 손은 어느새 꽃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꽃은 빨간데 먹고 난 입은 푸르둥둥 자주 빛이었습니다. 먹기 싫도록 먹고 나도 참꽃은 싫지가 않았습니다.
남천에서 장정으로 내려오는 길에 성황당 모랭이를 돌아 서면 거대한 가마솥처럼 생긴 골짜기가 아랫도리부터 빨가니 아직 누렁낙엽 봄 산에 연지곤지를 찍곤했습니다. 봄날이 따뜻해질수록 참꽃은 중턱을 지나 위로 올라갑니다. 참꽃이 가마솥 가운데 쯤 올라오면 배꽃과 벚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배꽃은 산에서 난 돌배나무인데 먼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불솜을 떼어다가 군데군데 박아 놓은 것 같습니다. 벗꽃은 분홍색입니다. 이불솜에다 분홍색 물감을 묻혀서 배꽃과 어울리게 박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어떤 데는 참꽃이 도화이지고 그 위에 배꽃과 벚꽃을 그려 놓은 듯한 거대한 꽃밭도 있습니다. 겨우내 푸르던 소나무 군락지와 잎이 다 떨어진 전나무 군락지도 듬성듬성 있고, 어떤 비탈은 바위만 잔뜩 쌓여서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나지 않은 곳이 있고, 갈색 낙엽이 붉으러니 남아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여 둥그런 분지가 바로 꽃둥우리였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가장 빠른 시기는 겨울입니다.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서 남자는 어깨와 허리에 빗겨 걸에 메고, 여자들은 허리에 가로 멥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철칙같이 여겼습니다. 아침밥을 먹을 때 운동화를 소죽솥 아궁이 숯불에 데웠다가 따끈따끈할 때 신고는 잠시라도 식기 전에 간다고 비탈길을 내려 달립니다. 크게 위험하지 않는 한 직선으로 달립니다. 밭두렁도 밟고 키보다 높은 논두렁도 내리 달립니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넘어져도 아프지 않으니까 훨씬 재미있습니다. 눈이 없는 맨땅을 달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언 손이 깨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차라리 여름에 넘어져 벗겨지는 것이 덜 아픕니다. 동네 아이들이 한꺼번에 모여 학년이 높은 형들이 앞장서도 동생들이 조심스럽게 뒤따라 내리 달리는 모습은 마치 언젠가 학교 운동장에서 공짜영화를 볼 때 군인들이 공산당을 잡으러 내리 달리는 모습을 연상하게도 했습니다. 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다랭이를 서너 발자국에 하나씩 내려 뛰어 빙 돈 길을 가로질러 내려오면 마치 영웅이나 된 듯한 기분입니다. 먼저 간 여자들을 뒤따라 잡기라도 하면 사나이가 다 된 기분입니다.
올라가는 길
겨울에 올라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추위만 이기면 되는데, 오르막이라 쉬 땀이 나 더워지고, 남향이라 뒤에서 부는 바람에 발짝만 떼면 될 때도 있습니다. 눈보라가 치면 더 신납니다. 눈이 밀어 주기도 하고, 나를 앞질러 가 당겨 주기도 합니다.
올라가기 힘든 때는 여름입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서 짓눌러 발짝을 떼기가 힘듭니다. 점심도 못 싸가서 수돗물로 배를 채운 오후에는 노란 현기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 때는 질러 갈 수도 없습니다. 길 가로 밭에는 목화를 심고 콩도 심고 옥수수도 심어 놓았거든요. 다랭이 논에는 벼가 물이 찬만큼 자라 있습니다. 물고가 자라는 논은 비교적 잘 커 있고, 비가 와야 물이 고이는 논은 시들하고 노란 것이 자잘합니다. 그래도 밟고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혼자 갈 때는 나뭇가지라도 하나 들어야 합니다. 굵은 곳을 잡고 휜 가지를 땅에 대고 밀면 이 나무는 외발로 뜁니다. 나는 두발로 걷고요. 한발로 뛰는 나무는 콩콩 찍어 달리는데, 돌을 차기도하고, 큰 돌은 훌쩍 넘어도 가고, 물웅덩이를 만나면 콕 박혔다가 진흙을 묻혀 나오기도 합니다. 아무리 오르막아라고 해도 힘들지도 않은지 잘도 올라갑니다. 나는 나무 뒤를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덧 성황당까지 다 올라옵니다.
친구들과 여럿이 올 때는 개울로 올라오기도 합니다. 학교 앞에서 시작해서 남조랑 갈라지는 길 까지 절반정도 올라옵니다. 그럴 때는 벌과 뱀을 조심해야 합니다. 뱀은 발견하기만 하면 물릴 염려는 없습니다. 돌맹이나 나뭇가지로 잡으면 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벌입니다. 집을 모르고 건드렸다가는 달려들어 쏘기 때문입니다. 길로 갈 때는 큰 돌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넘어지지 않지만, 개울로 갈 때는 발끝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잘못 삐끗하면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면 옷도 젖고 더 큰 문제는 등에 맨 책이 젖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웅덩이에서 목욕도 합니다. 집에 와서 신발을 벗으면 반쯤은 말라 있습니다. 운동화 바닥이 하얗게 빨려 있는 것이 신기합니다. 운동화를 한번 사면 다 떨어져 버릴 때까지 빨아서 신는 다는 것을 몰랐는데, 시커맸던 운동화 바닥이 다시 깨끗해 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한번은 혼자 성황당 모랭이를 돌아 내려오다가 산 아래 장정이 빤히 내려다보이는데, 비탈 논밭 사이를 돌고 돌아 내려가지 않고 똑바로 길을 내면 어떨까 생각을 했습니다. 똑바로 낸다고 해도 울멍줄멍 언덕과 계곡이 있으니까 다릿발을 세우고 튼튼하게 쇠꼽(쇠)으로 길 넓이만큼 만들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똑바로 다리만 놓는다면 10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동네가 너무 높아서 미끄럼틀 같아 눈이 와 미끄러워 못 다니게 된다면 조금만 구불렁하게 만들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커서 성공한다면 이 남천에다가 똑바른 다리를 놓고 말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랜 세월 후 스무 살이 되던 78년에 고학으로 야간대학에 나닌다고 서울에 갔더니 콘크리트로 된 차가 다니는 다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놓인 것을 보고 바로 이거구나 싶었습니다. 지금은 비가 오면 흙이 파여 나가고 바위가 불쑥불쑥 튀어 나오던 길에 까만 아스팔트가 깔리고, 아무리 비탈이라도 남천에서 장정을 차로 5분이면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남천길
이 길이 어른들에게도 힘들었나봅니다. 일요일에 우리 집과 현숙이네 집 두 집이 교회에 갔습니다. 큰 아이들끼리 교회를 가면 동생들은 어머니가 업고 오셨습니다. 현숙이네는 시어머니가 계시고 남편도 교회에 안 가서 작은 아이들을 맡겨두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집은 모든 식구가 교회를 가야 하는데, 걷지 못하는 동생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대로 업고 오시면 됩니다. 아버지가 출타를 하실 때가 문제입니다. 어머니 혼자서 아이를 업고 오다가 아이가 잠이 들기라도 하면 축 늘어져 더 무겁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띠를 풀어서 길 가에다가 아이를 재워놓고 오십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손으로 등이라도 잡으면 덜 무거운데, 잠이 들어 늘어지면 줄줄 흘러내려서 나무토막보다 더 힘이 든답니다. 어린이 예배를 마치고 어른 예배를 드리니까 얼른 올라가서 동생을 데리고 가라고 하면 불이 나게 뛰어갑니다. 다북쑥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곤히 잠들어 있는 동생을 보고야 마음을 놓았습니다.
요즘처럼 거리를 헤매는 개는 없었습니다. 집을 지킬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개를 키우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뱀은 길을 가다가 흔히 보았습니다. 논가라서 막 심은 벼포기 사이로 개구리도 펄쩔펄쩍 뛰어 다녔고, 개미떼도 비가 오려고 하면 길게 줄을 서서 이사 가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차가 다니는 일을 없었습니다. 산판을 할 때 외에는 버스가 유일한 구경거리였습니다. 산판은 농사일이 다 끝난 겨울이나 했습니다. 농사일이 아니면 사람이 지나 다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길가에 아이를 잠깐 재워 놓고 예배가 끝난 아이들을 빨리 가 보라하면 괜챦을 줄 생각하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유난히 몸이 약하셨습니다. 다른 어머니는 밭에 갔다가 돌아 올 때는 꼴단이라도 한 단 이고 오는데, 우리 어머니는 호미만 들고 와도 눈에 흰 동자가 검은 동자를 1/3쯤 덮을 만큼 피곤해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이를 업어 주는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나무 그늘이 아니라도 아직 봄볕이이라 해가 따갑지 않고 엄마의 등만큼이나 따뜻했던 모양입니다. 동생은 잘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야 물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자는 아이를 길가에 그렇게 풀러 놓고 갈 수 있느냐고. “그럼 어쩌느냐고, 재종은 벌써 쩡그렁쩡그렁 울리지, 잠이 들어 축 늘어져 발걸음은 안 떨어지지.” 나는 하나님께만 잘하면 아이들은 하나님이 책임져줄 줄로 생각했답니다. 어차피 목구멍도 살기 어려운 살림이라서 자신이 돌보려 해도 돌볼 수가 없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4남매가 이만큼 잘 자란 것은 어머니의 이 신앙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아버지의 남천길
아버지의 길이 힘든 것은 비료를 나를 때입니다.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한 해 쓸 비료를 농협에서 집으로 날라야 합니다. 복합비료 요소비료 인산 가리 등 20킬로그램짜리 비닐로 싸인 비료를 일일이 등짐으로 져 날라야 합니다. 차라고는 버스만 있는 줄 알았지 트럭이라고는 생각도 못해 봤습니다. 지금도 남천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은 있지만 경운기는 없습니다. 경운기가 일 할 수 있는 밭이 없고 경운기로 나를만한 길도 없습니다. 경운기로 논을 갈려 해도 경운기를 돌릴 만큼 두꺼운 논도 별로 없습니다. 경운기도 없는데 리어카는 당치도 않습니다. 소가 끄는 구루마는 구경은 했지만 우리 동네에는 없었습니다. 구루마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거든요. 소로 나를 수 있는 것이 안장을 지우고 그 위에 비료를 균형을 맞추어서 양쪽에 3포씩 여섯 포를 얹으면 소는 큰 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 임자는 두포만 지고 달랑달랑 따라가면 신선노름입니다. 우리 집에 소는 가끔 있었지만 밭이나 논을 갈 때는 이웃에서 빌려와야 했습니다. 소를 길들여 부릴 만큼 길래 있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비료를 등짐으로 밖에 나를 방법이 없습니다.
농협에서는 마을단위로 이장을 불러 비료를 신청한 대로 세어 놓고 집집이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비료 나르는 날이라면 온 동네 사람이 동원됩니다. 소가 있어서 짐 지우는 집은 두세 집뿐이고 모두 지게로 날라야 합니다. 소가 없어도 식구가 많은 집은 아버지가 장정에서부터 대여섯 포를 한 짐으로 지고 올라오면, 다른 식구들은 2/3 되는 지점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거기서부터는 올라오는 길의 경사가 40도 가까이 되니까 식구별로 하나씩 덜면 집에까지 오면 반으로 줄든지 한두 포를 지고 대문 문지방을 넘으면 됩니다. 소로 나르는 집도 두세 번은 다녀야 하는데, 등짐으로 지는 집이라도 식구가 많은 집은 반으로 줍니다. 아버지 혼자 나르는 집은 대여섯 번은 오르내려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날랐습니다. 그것도 횟수를 한번이라도 줄이려고 한 짐을 잔뜩 지고 다니셨습니다. 가파른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마중 나갈 아들도 없고, 어머니도 내려가서 한 포 이고 올 근력도 없이 안타까이 기다릴 뿐입니다. 이웃집은 어머니 삼촌 큰아이들이 왁짜지껄 웃으면서 비료 먹고 자랄 농작물 생각하며 즐거이 포대를 쌓아가도, 우리 집은 시작부터 아버지 혼자 싸워야하는 농사일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화를 내는 건 도리어 어머니였습니다. 시원한 냉수를 들어다 드리면서 땀수건으로 이마를 훔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이롱 바가지를 마당에 던지고 솥뚜껑을 와장창 열어젖히며 냄비 뚜껑을 집어 던지고, 안 깨질 만큼 심통을 더 부리십니다. 어머니도 안타까운데 어쩔 수가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러면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다. 앉아서 쉬었다가 가시는 것이 아니라, 빈 지게 지고 걸어 내려가면서 쉬는 것입니다. 꽃 둥우리를 꽃 둥우리로만 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생이 만만치 않음을 꽃향기 속에서 깨달아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