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골
남천을 샘골이라고 했습니다. 맑은 샘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 옛날에 샘골이라고 불렀다가 일제시대에 지명을 한문화해서 관에 등재한다고 이름을 지은 것이 남천(南泉)이랍니다. 샘골이 일곱 동네 중에 가장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샘골에 지금은 단양 유황온천이 들어섰습니다. 옛날에 샘이 난다고 해서 샘골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따뜻한 물이 솟는 온천이 되었습니다. 단양유황온천은 유난히 미끌미끌해서 비누끼를 제거하려면 다른 목욕탕에서보다는 배나 시간이 걸립니다. 여느 탕에서는 물이 눈에 들어가면 따겁거나 뻑뻑한데, 단양유황온천에 물을 눈에 들어가도 아무 느낌이 없답니다. 눈에 들어간 물이 눈물인지 온천물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이니까 물이 얼마나 깨끗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샘골이라는 이름이 과연 명분 없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한겨울이면 우리는 썰매를 탑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생이면 누구나 약속을 하지 않아도 썰매를 매고 얼음판에 나타납니다. 함석물동이 밑판을 떼어 외날을 해 붙이고, 손잡이를 한 막대기 끝에 못을 거꾸로 쳐 박은 바늘에 꿰어 어깨에 매고, 얼음 잘 얼은 논을 찾아가 날이 저물도록 얼음을 지칩니다. 한 논에서 싫컷 타면 계단식 논을 아래로 내려가면서 탑니다. 우리 동네서 시작한 썰매가 나중에는 옆 동네 남조 끝자락까지 내려갑니다. 우리 동네가 끝나고 남조가 시작되는 곳에 원각이네 논이 있었는데, 이 논은 영 얼음이 얼지 않았습니다. 눈이 펑펑 와 온 산이 덮여도 이 논만은 말갛게 가라앉은 짚푸라기가 지난 가을에 벤 벼 끌컹들 사이에 누워 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논에 물은 따뜻하다고 해서 손을 담궈 보면 정말로 신기하게 따뜻했습니다. 담그고 있을 때는 따뜻해도 담갔다가 손을 주머니에 넣거나 장감을 끼려고 말리려면 찬바람에 또 그만큼 시려야 하니까, 시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쨌든 옛날의 샘골은 지금도 여전히 샘골입니다.
양지말
집에서 물이 흐르는 계곡을 넘어 처음 있는 밭이 양지말입니다. 장정에서 남천으로 올라오다보면 그냥 편편해 보이기만 한 이 양지말이, 지게를 지고 계곡을 건너와 발을 들여다 놓으면 엄청 비옥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맨 위에는 산 아래 우리 김씨집안 산소로 쓰는 밭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증조할아버지에서 할머니, 먼저 돌아가신 큰아버지 산소가 있습니다. 막내 작은 아버지는 30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거기에 묘가 없습니다. 아직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데 거기에 쓸 수가 없다고 해서 장정 뒷산에다가 산소를 썼습니다.
그 아래로 동네 사람들의 밭이 비스듬한 양지말 들판을 가로로 골을 타고 빗겨져 있습니다. 장정 골짜기 내에서도 흔히 볼 수 없이 너른 들판입니다. 축구장 길이보다 더 긴 고랑을 수 십 개씩 가진 밭들이 끝도 보이지 않게 아래로아래로 잇대어져 있습니다. 아마 동네 꼭데기집에서 끝에집까지 가는 길이만큼이나 될 것입니다. 맨 위는 산이고 양쪽 가는 벼랑인데, 벼랑 아래로는 모두 양쪽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벼랑은 어디든지 나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리 장마가 져도 유실되거나 사태가 나지 않을 만큼 나무가 비스듬히 서서 이 옥토를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양지말 밭 끝에서 끝까지 남쪽가로 길이 나 있는데, 길 가에 밟히고 밟혀도 죽지 않는 풀들이 또 흙을 꼭 잡고 옥토를 보존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밭은 꼭데기 산소자리 외에는 없습니다. 누에를 기르느라고 양지말 중간쯤에 뽕나무 밭을 도지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뽕나무밭 둑에서 이상한 것이 나왔습니다. 남의 밭과 경계를 짓는 밭둑 아래에는 밭에서 나오는 돌을 모으는 자리인데, 가끔은 검색의 단단한 기와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동네서 기와집이라면 부잣집 권씨네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집은 모두 초가집입니다. 새마을운동으로 씌우기 시작한 스레트는 한 참 후의 일입니다. 기와를 봐도 마당을 지나가면서 지붕에 있는 것 쳐다보기만 했지 만져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뽕나무밭 밭두렁에서 기와 쪼가리를 볼 수 있다니 참 이상했습니다. 보기보다는 엄청 두꺼웠습니다. 부잣집이 이 근방에 어디 있었나 싶었습니다.
오랜 후에 양지말의 전설을 어머니에게 들어서 알았습니다. 본래 샘골 동네 자리가 여기 양지말이었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들이었다면이야 양지들이 되었을 텐데, 양지말이라고 부른 다음에야 마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양지말 부잣집의 종들과 부잣집의 땅을 붙이고 사는 소작농이었답니다. 밭가에서 나오는 기와가 그때 부잣집기와랍니다. 이 편편한 옥토가 마을이었습니다.
약물내기
집에서 골짜기를 건너 양지말에 온 만큼 더 가면 약물내기가 나옵니다. 약물내기에는 우리 논이 있었는데, 이 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이 논 바로 위에는 담배밭이 있었습니다. 담배를 심을 때 꼭 필요한 것이 활착을 하기 위해 물을 주어야 하는데, 이 논가에서 나는 물을 길어다 주면 됐습니다. 말하자면 이 논에 물이 없으면 담배농사도 지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약물내기라는 지명이 이 논에 물을 두고 붙인 이름입니다.
이 물이 약물이었습니다. 피부에 무슨 병이라도 걸리면 이 물을 떠다가 씻거나 담그면 나았습니다. 옛날에 약도 변변치 않은 시절에 물만 발라도 낫는다니 가난한 사람들이 자연 꼬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약물내기 아래에 동네가 양지말이었고, 양지말에는 샘골의 부자가 살았는데, 약물내기를 찾아 온 사람들은 자연 이 부잣집에서 신세를 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잣집 처지에서는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농사지어 남 좋은 일도 한도가 있는 것이고,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을 것을, 병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중을 기약할 것도 없고, 더 이상 귀챦은 일 당하지 않을 방도를 궁리해야 했습니다.
약물이 없어지면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사람이 찾아오지 않으면 번거롭지도 않을 것이고, 더 이상 걸뱅이들에게 양식을 축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옳지 그렇군!' 하면서 부자집 주인이 약물내기를 없앨 방법으로 찾았습니다. 어느 용한 사람에게 물어서 찾아낸 방법이 죽은 개를 그 약물에 던져 넣으면 약효가 없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기르던 개를 죽여 솟아나는 약물 던져 넣자 약효가 사라졌습니다. 병든 사람이라도 더 이상 약물내기에 찾아 들 일도 없어졌고, 양지말에도 당연히 신세를 지러 오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부잣집은 조용한 날을 평안히 보냈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세간살이 하나 건지지 못하고 사람 몸만 겨우 빠져 나왔습니다. 밭둑에 있던 기와장이 그 부잣집의 기와장이랍니다. 우리나라에 자린고비같은 부자도 있었고, 이런 몹쓸 부자들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양지말은 땅이 비옥해서 집을 짓고 살기만 하면 부자가 쉽게 된답니다. 그런데 생긴 모양이 도마 같아서 한번 닦아내면 깨끗이 닦이듯이, 한번 변을 당하면 남는 것 없이 깨끗이 없어진다고, 어떤 지나가는 어른이 말했답니다. 그 후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금의 남천으로 동네 중심이 이동하였습니다. 남천은 소 안장 같이 가운데는 툭 불거져 나오고 양쪽 가는 쑥 들어가서, 하늘의 큰 손이 한번 쓸어도 단번에는 쓸려지지 않는 답니다. 좀 가난하고 고생스러워도 살아남기를 바랐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