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안전관리의 일을 하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습관이 저절로 길러졌다. 점검표를 들고 전기실로 갈 때는 발걸음은 느리지만 생각은 빨리 돌아간다. 보이지 않는 전기가 어디로 흐를 것인가? 어디를 먼저 가야할까? 얼마나 많은 전기가 흐를까? 생각이 많을수록 걸음은 느려진다. 차분하고 확고해진다. 전에는 없던 버릇이 생겼다.
난 걸어 다니기를 좋아해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녔다. 시내에서 출퇴근을 할 때는20~30분이 걸리는 거리도 걸어서 다녔다. 걸어서 다니는 대신 걸음이 빨랐다. 빨리 걸어야 운동도 되고,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기판넬을 열어서 점검하는 일을 하면서 걸음이 느려졌다.
걸음만 느려진 것이 아니다. 운전도 느려졌다. 웬만하면 추월하는 차를 그냥 두고, 내 앞에 끼어들면 끼어들려고 하는 대로 다 끼어들게 한다. 1차로는 될 수 있는 대로 타지 않고 2차로나 3차로로 다닌다. 하루 종일 운전을 하면서 다녀야 하는데, 급히 서두를 이유가 없어서다. 금방 달려가고 일이 끝난다면 얼른 해 치우고 말텐데, 어차피 하루 출근을 했으면 하루 종일 운전을 하고 다니면서 점검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빨리 갈 필요는 없다. 안전한 것이 최선이다. 전기 판넬 열듯이 찬찬히 운전하는 습관이 들었다.
전기 판넬을 열 때는 운전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전기는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다. 하지만 점검을 하다가 전기가 실체를 드러냈다 하면 대형 사고가 나기 때문에 예방이 최우선이다. 고압 판넬을 열 때 얼굴을 외면하고 열어야 한다. 판넬 안에 충전되어있던 전기가 문을 여는 순간 밖으로 폭발하듯 방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엽 과장은 그래서 판넬을 열기 전에 안을 들여다본단다. 지중전선을 타고 지하로 막 들어 온 판넬인 LBS(부하개폐기) 판넬에는 구멍이 하나 나 있다. ASS(자동구간개폐기)를 수동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뚫어 놓은 구멍이다. 거기를 들여다보면서 혹시 이상한 것은 발견되지 않는지, 냄새는 나지 않는지, 사전 점검을 하고 문을 연단다.
판넬을 열 때도 고압을 먼저 열지 않는다. 혹시나 충전된 전기가 있더라도 저압부터 열어서 위험성을 줄여야 한다. 난 그동안 고압부터 열었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고압이었기 때문이다.
“수배전 전력설비 : CH, ASS, PF, MOF, COS, TR
육안 점검, 정상.”
하고 점검결과를 적을 때 가장 앞에 있는 것이 고압 중에 가장 앞에 있는 판넬이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저압부터 열어야 혹시라도 방전이 된다면 고압보다는 덜 위험할 것 같았다. 이것도 습관을 바꿨다.
전기실에 들어서자마자 고압 판넬의 손잡이부터 잡던 것을 가장 낮은 전압의 판넬부터 천천히 걸어간다. REC, ATS, ACB, 등 저압을 먼저 열어 점검을 한다. 활짝 열어 둔다. 정전기도 남아 있다면 밖으로 나가고, 판넬 안에 열도 축적되어 있다면 열도 식으라고 말이다. 그리고 고압쪽으로 간다. TR, MOF, LBS 등 거꾸로 판넬을 열어 간다.
이것은 차단기를 개폐할 때도 같은 순서다. 고압을 점검하느라고 개방을 할 때는 저압의 가장 작은 차단기부터 차례로 내린다. 메인차단기를 가장 나중에 내린다. 투입을 할 때는 반대다. 판넬 가장 상단의 메인 차단기를 먼저 올리고, 아래에 있는 하부의 2차 차단기를 올린다. 판넬을 열고 닫을 때도 이런 순서를 지켜야 한다. 처음에는 시험을 볼 때는 정답을 맞출 수가 있지만, 몸으로는 익지 않아 순서를 헷갈릴 때가 있다. 하지만 실재로 전기를 만진다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순서를 꼭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 있고, 전기 사고는 났다하면 대형사고이기 때문이다. 판넬을 여는 순서도 습관으로 몸에 익혀야 한다.
지난 금요일에는 퇴근을 준비하기 위해 회사로 막 들어가는데 전화가 왔다. 사무실이다.
“김부장님, 우리캠핑장에 점검 담당이시지요? 거기가 지금 차단기가 내려 간데요. 연락 한번 해 보세요.”
이제 5분이면 도착하는 사무실을 앞에 두고 길 가에 차를 세웠다. 우리캠핑장 운영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잔디밭에 있는 차단기가 떨어져요. 어떡하면 좋죠?”
“가만있어 보자. 내가 일정을 볼게요. .... 다음 주 금요일에 잡혀 있네요. 어디가 문제가 있는지, 그때 가서 봐 줄게요.”
“아니에요. 지금 당장 오셔야 해요.”
말 하는 투가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재계약은 없다’는 말이 장전된 총알처럼 목구멍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당당하고 위협적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다. 지금 당장 가는 수밖에....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하고는 차를 돌렸다.
5분 쯤 갔을까? 생각이 번쩍 스쳤다.
“금방 오란다고 그냥 막 갈 일이 아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는데, 사무실에 가서 내 차를 끌고 가야 점검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갈 수 있겠다.”
차를 돌려 회사로 갔다. 오늘 하루 일정과 자동차 운행일지를 보고서에 적고, 내일 일정을 또 적고, 오늘 쓴 법인카드를 경리에게 넘겨주고, 내 자동차를 타고 다시 우리캠핑장으로 출발했다. 회사에서 우리캠핑장과 우리 집은 사각형의 세 꼭지점처럼 벌어져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시간으로나 거리로나 훨씬 낫기 때문이다.
우리캠핑장에 도착하니 15분 전 6시다. 이상이 있다는 판넬은 캠핑장 잔디밭에 낮게 설치되어 있다. 우선 측정기구가 든 가방을 메고 가서 땅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차단기를 만지려면, 주인이 말하는 대로 차단기의 고장 여부를 측정하려면, 자세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전기가 혹시 번쩍 해도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한쪽 무릎을 꿇는다거나, 까치발을 든다거나, 몸을 기울이는 일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 퇴근시간이 다 되었다고 서두를 일도 아니다.
시간은 잊고, 안전에 최우선을 두고, 안정된 자세를 잡고 메가를 빼 들었다.
“사장님, 여길 보세요. 이게 땅이에요. 전선이 땅과 닿으면 합선이 되는 것이에요. 합선이 되는 표시가 이 바늘이 반대편으로 가는 것이에요. 잘 보세요.”
차단기에서 나간 여섯 개의 선 중에 다섯 개가 절연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메가의 바늘이 빠르게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이건 차단기가 고장난 것이 아니에요. 이 판넬에서 각자 텐트 앞에 설치되어 있는 판넬까지 가는 선이 중간에 단락이 되는 거예요. 요즘 비가 많이 와서 전선이 지나는 곳에 물이 닿거나, 전선이 오래 되어서 절연이 깨진 거예요. 배선 공사를 다시 해야 합니다.”
“그럼, 여기서 각자 텐트 앞에 설치된 판넬까지 전선이 갔는데, 거기는 괜찮은지 봐 주세요.”
“거기는 콘센트 밖에 없을 거 아니에요. 콘센트만 빼면 되지요. 볼 필요 없어요.”
“그래도 한 번 봐 주세요.”
봐 달라는데, 하는 수 없다. 아까처럼 단호하다. 주판넬에서 나간 11개의 하부판넬을 일일이 다니면서 이상이 없는지 메가로 측정을 했다. 주판넬에서 하부판넬까지 오는 것만 문제가 있지, 하부판넬에서 코드를 꼽는 콘센트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점검을 하면서 또 생각을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그래. 그럼, 그렇지. 그거구나.”
주말이라서 캠핑장에 손님은 많이 받았는데, 전기가 갑자기 안 되는 것이다. 찾아 온 손님에게 전기가 그냥 안 된다고만 하면 설득력이 약하니까, 전기쟁이인 나를 불러서 점검을 하면서 한 바퀴 돌아 ‘주인이 이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자하는 의도라는 것을 알았다. ‘전기 전문가가 와도 당장은 안 되는 것이니,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전기 점검이 문제가 아니다. 잔디밭 가운데 서서 주인을 불렀다. 손짓을 양손으로 해 가면서 설명을 했다. 주인이 들으라는 설명이 아니다. 캠핑을 온 손님들이 보라는 말이다.
“오늘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고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내 자세만 안정된 것이 아니라, 내가 점검하는 수용가도 안정을 찾게 하는 눈치는 좀 있어야 한다.
또 하나 들어야 하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 판넬을 점검하는 마지막 단계다. 한 달은 됐다. 뜬금없이 써니빌 김진휘 대표가 문자를 보냈다. 대뜸 한다는 소리가,
“전기실 판넬을 열어 놓고 가면 어떡합니까?”
하면서 전기실 문이 열린 사진 하나를 보냈다. 내가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열렸네요. 제가 열어놓고 왔는지, 그 후에 열렸는지 모르지만, 제 불찰입니다. 고압이 열렸어도 장갑을 끼고 닫으면 되는데요. 저는 17일에나 갈 예정입니다.”
하고 문자를 보내고, 바로 통화를 했다. 이틀을 열려 있었단다. 지금은 자기가 닫았으니, 다음에 오면 혹시라도 짐승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잘 살펴 달란다.
아직 새 판넬이라서 잠금장치가 잘 되어있고, 저절로 열리지 않는 것이다. 분명히 내가 닫지 않고 온 것이다. 점검을 할 때 꼼꼼히 본다고 해도 이렇게 문을 닫지 않고 올 정도면 심각한 것이다. 문이 열린 사이에 비라도 와서, 빗물이 바람에 들이쳐 들어갔으면 불꽃이 튀었을 것이다. 수변전실에 울타리라도 쳐 졌으니 망정이지, 들짐승이 가까이 갔다가는 고압에 철컥 들러붙었을 것이다. 짐승이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마을 전체 전기가 나가고, 그 정도면 한전에서 출동을 해야 해결될 문제가 된다.
다시 마음먹었다. 꼼꼼히 마무리를 잘 하기로 말이다. 그동안 몇 달을 다니면서 나와 연배도 비슷하고, 만나면 간단한 농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야, 여기 참 좋습니다. 동막골같아요” 하면,
“다른 건 좋은데 벌레가 많아요”라고 속마음을 털어 놓기도 했다.
“볕이 좋아 빨래가 다 구워졌습니다”하면,
“빨래가 구워져요? 신선한 표현인데요?”하기도 했다. 그만이라도 하니 사무실에 전화를 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문을 닫았노라고 문자를 하고 참아 준 것이다. 나는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허당기가 있어도 이런 허당기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장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다. 이번에는 강남하이퍼 기숙학원 강설중 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장님, 왜 전기판넬 문을 안 닫고 가셨어요. 퇴근하려고 전기실 문을 열었다가 불이 켜져 있기에 봤더니, 전기판넬이 열려있었어요.”
“아 그래요? 내가 깜빡 잊고 문을 닫지 않은 모양이네요.”
난 ‘아이고, 또 열어 놓고 왔네’하는 말이 튀어나올까봐 조심해서 말했다. 이런 말은 내 발등을 내가 찍는 꼴이다.
“저압 쪽에 판넬의 겉문과 속문까지 다 열려 있어요.”
“내가 속문까지 일일이 다 열고 점검을 했거든요. 소장님, 장갑을 끼고 닫아 주세요. 내가 안 닫고 온 모양이에요. 미안해요.”
여기는 짐승이 들어갈 염려는 없다. 저압이니 또 그리 위험하지도 않다. 그래도 판넬 문은 닫혀있어야 맞다.
다음 점검일이 되어 소장을 먼저 찾았다. 써니빌 김진휘대표는 나와 연배가 비슷해서 단순 실수라고 했다. 단순실수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여기 강남하이퍼의 강설중 소장은 대뜸 한다는 소리가,
“연세 드신 거 인정해야 해요. 나도 가끔 그래요.”
나보다 15살은 더 어려 보이는데, 내가 나이가 많다고, 치매정도는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어서 깜빡깜빡하는 거라고, 나이 탓을 한다. 나이 많아 그런 거라면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다. 아직까지는 완치 불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더 나아질 희망이라고는 없는 병이다. 남은 것이 있다면 그만두고, 여기서도 은퇴하는 일 뿐이다. 젊은 사람이 더 무섭다. 같이 늙은 사람은 자기도 맞닥트린 현실이라서 함부로 나이 탓을 하지 않는다. 억지로 거부하고 싶은 일이다.
세상에 앞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꿀만한 것이 치매치료제다. 치매란 노화로 인한 뇌세포의 소멸이다. 인생의 당연한 과정이다. 세포 중에서 가장 민감한 것이 뇌세포인데, 늙어 소멸하는 뇌세포를 치료해서 다시 젊은 세포로 되살리는 것이 치매치료제다. 뇌의 세포를 치료한다면 뇌세포 뿐 만아니라, 온 몸의 늙은 세포를 젊은 세포로 만드는 것으로 발전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러면 결국 늙은이를 젊은이로 만든다는 말 아닌가? 늙어서 죽을 사람에게 약물로 치료를 해서 젊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늙지 않는 약 아닌가? 불로초(不老草) 말이다. 쉽게 여드름치료제니, 암치료제니, 무슨 치료제니, 어떤 치료제니 하는 말은 많아도, 치매치료제는 차원이 다른 말이다. 이것이 정말 나왔다가는 인류의 역사가 바뀐다. 아니 역사뿐만 아니라, 철학이 바뀌고, 신학이 바뀌고, 종교가 바뀐다. 인생관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고, 우주관이 바뀔 사건이다.
나는 이런 치매 치료제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아직은 내가 치매를 걱정해야할 정도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점검했던 판넬을 꼼꼼히 닫겠다고 다짐을 해도 또 열어 놓고 왔다. ‘저 앞의 판넬을 열었던가 닫았던가’를 기억해서 꼼꼼하게 닫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랬다가는 깜빡 실수를 한다. 이제는 다짐 가지고는 안 되겠다.
치매치료제를 먹어서 총명한 정신을 되찾기는 나도 글른 이상, 새로운 습관을 하나 더 들여야 겠다. 점검을 다 마치고는 전기 판넬을 한 바퀴 돌고 나오겠다고 말이다. 아주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것을 점검의 마지막 순서로 만들어서, 도는 사이에 혹시라도 닫지 않는 판넬을 다시 닫고, 칡넝쿨이 침입했으면 걷어 내고, 돌맹이가 올라 온 것이 있으면 걸리지 않게 주어 내고, 점검을 마무리하도록 해야 한다.
자기개발서에서 단골로 써먹는 말이 있다.
“생각이 말을 바꾸고, 말이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습관을 바꾸고, 습관이 인생을 바꾼다.”
고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공하기를 바라기 전에 성공할 수 있는 습관을 길러야 한단다. 우리는 아니다. 앞과 중간을 다 생략하고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전기 사고는 났다하면 중대한 사고다. 고압에 걸렸다하면 순간에 철컥 붙어 버리고 만다. 그러기 전에, 생각도 하기 전에, 안전한 습관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습관이 목숨을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