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했고 자랑스러웠던 사람은 가슴에 넣어두고 꺼내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려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그 모습을 꼭꼭 가슴속에 새겨두었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삼십 년이 훌쩍 넘었다. 아버지가 몹시 보고 싶으면 눈을 감고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았었다. 돌아가신 후 몇 년간은 아버지의 모습이 잊히지 않을 것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고 보이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지곤 한다. 이제는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흑백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감색 양복도 입혀드리고 볼연지도 발라드린다. 사진 속에서 나와 마치 내 앞에 서실 것 같은 아버지, 그 부드러운 미소를 본다. 또, 아버지의 따뜻한 손의 감촉도 느껴본다. 그런데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는 희미하기만 하다. 아버지가 뒤에서 정아’라고 부르실 때, 반가움에 뒤를 돌아본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도 부르는 소리 있으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
내가 듣기에는 아버지와 남동생의 목소리가 전혀 다른데, 남동생의 목소리가 아버지와 닮았다면서 동생에게서 아버지의 음성을 애써 찾으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립다. 꿈속에서라도 한 말씀 하셨으면 좋으련만 언제나 말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꿈을 꾸고 나면 아버지의 젖은 목소리라도 한번 듣고 싶다.
내가 국민학교 사 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는 중고 녹음기를 사 오셨다. 테이프의 넓이가 약 일 센티미터가 되는 reel-tape 녹음기였다. 목소리가 녹음되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었다. 우리 가족은 녹음기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녹음을 위한 가족 노래잔치를 벌인 적이 있다.
제일 먼저 아버지께서는
“에, 에, 마이크를 시험합니다.”라고 먼저 녹음이 되었나, 시험을 하신 후,
“오늘은 단기 4292년 3월 24일 우리 가족 노래자랑이 있겠습니다.”하시곤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타향살이’를 부르셨다.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영향인지, 동생은 일어나서 차려 자세로 애국가를 불렀고, 나는 ‘기미년 삼월 일일’로 시작하는 삼일절 노래를 음치지만 열심히 불렀었다. 어머니는 ‘목포의 눈물’을, 셋째는 말을 채 배우지 못해 ‘아, 아’하는 소리만 담았었다.
그 녹음기는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음성이 담긴 테이프만은 보물처럼 이삿짐 속에 넣어 가지고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수많은 이사에도 잘 보관되어 왔다. 이젠 reel-tape녹음기 자리에 카세트테이프 녹음기가 자리하고 있다. 책꽂이 한편에 꽂혀있는 테이프, 그 테이프만 있으면 언제라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테이프의 재생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테이프를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녹음했던 장면이 살아 나오고,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람이 백 년을 산다는 것은 스스로 칠팔십 년을 살고 자녀들의 가슴속에서 이 삼십 년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그 이 삼십 년을 위해 나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최대한 이용하여 열심히 사진도 찍고 녹음, 녹화도 해 두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정기적으로 재생 복사해 두지 못한 안타까움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가끔 재정리도 한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를 얼마만큼의 크기로 그리워할지 알 수 없으니, 발명품들의 덕분에 자녀들의 마음뿐 아니라 손자들의 가슴에도 덤으로 살고 싶다는 것은 나만의 과욕일지도 모른다.
흑백 사진
빛바랜 사진 위에
아버지가 웃고 계신다
감색 양복 입혀드리고
볼연지도 발라 드린다
사진 속에서 나와
다정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시는 아버지
따뜻한 손잡으려
손을 내미는 데
어느 사이
돌아가
희미한 미소만 보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