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의 여정, 마침표를 찍다.

by 선심화

스물두살, 세상물정 모르던 그 시절 면사무소로 첫 출근하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건물안에 네모난 것들만 있을법한 흰색의 외관, 펄럭이는 태극기가 누가봐도 면사무소다

아버지뻘 되는 주사라고 호칭되는 사람들이 여럿....


그 당시는 공무원도 성비를 나눠 뽑았다

남성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게 뽑았던 시절 유일한 여성으로 합격하고 꿈에 부푼 평생 직장으로 출근했는데 마주한 현실은 사무실에 그윽히 배인 담뱃내, 책상위 재떨이, 타닥타닥 타자기, 낯선 풍경에 어안이 벙벙, 그렇게 35년의 여정이 시작됬다


내 책상이란다. 앉으란다. 아무것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다


무조건 그냥 시작했다.

등초본 복사하는 것부터 시작한 내 공무원 직장생활의 첫 기억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임에 분명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출근한 첫날부터 복사하고, 동네 이장이라는 나이 많은 아저씨들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수입증지를 풀에 잔뜩 발라 붙이고 소인을 하면서 뉘집딸이 면서기로 왔나 관심어린 시선을 받으며 그렇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행정직공무원은 순환보직이다

직원들이 바뀌어 업무가 또 바뀔라치면 두근두근 새가슴되어 새로운 업무 익히기를 숱하게 하면서 맷집이 생기고 나자신을 보호하는 방법도 터득하면서 지내온 35년의 세월이 순탄할리 있겠는가

시골 면사무소에서 5년을 근무하고 서울로 근무지를 옮겨 생전 처음 도시생활을 30년, 숱한 애환을 뒤로하고 정년을 4년이나 남기도 나는 퇴직을 결정했다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 기회도, 사랑하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도, 일선에서 정책을 녹여내며 국민들의 복리향상을 위한 보람찬 일도 가치있게 와닿기 전에 스스로 고갈된 에너지가 너무도 싫었다.

만약 내년에도 여기 있다면 열정없이 꾸역꾸역 일할 내 모습이 상상되어 싫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용기 내어 나를 탈출시켰다.

애써 외면했지만 한치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는 건 거짓이다

좀 더 버티면 얻을 수 있는 승진기회, 늘어나는 월급, 현실적인 조건들이 하얗게 태워버린 내 영혼과 뒤섞여 뒤죽박죽이였지만 나는 자유가 필요했다

창살없는 감옥에서 뛰쳐나와 또다른 세상에 눈뜨고 싶었고 일중독인 나를 구해주고 싶었다

일단은 성공했다. 알람소리 끄고 마음껏 잘 수 있는 아침이 보장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사 알다니...

이 시대 출근하고 퇴근하는 다수의 직장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주변에 있는 상사, 동료, 부하직원 만나는 관계속 우리들 모두 소중한 인격체라고..

가정환경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 타인들이 모여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향으로 성과를 내면서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더 많이 머무르는 곳에서 만나는 관계다


내가 어려운 만큼 상대방도 어렵다고, 나만 어려운게 아니라고, 한번 더 말하고 싶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도, 눈에 넣어도 안아픈 자식도 늘 편안하기는 쉽지않다

실상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하물며 타인들만으로 묶인 직장생활은 어느 누구 하나 편할 수 없다.

서로서로 애쓰는 관계, 좀 양보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그런 직장생활이였음 좋겠다


긴 35년의 직장생활을 마치면서 꼭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일은 사람이 하는거라고, 그러니 주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특히 사회초년생들을 잘 가르치고 알려주고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고, 실수가 반복되더라도 젊은이들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하고싶다

그들은 직장에서 아프게 하지 않아도 마주한 현실 전부가 힘들고 아픈 세대이다

이제 나는 긴 여정을 끝내고 후회없이 애쓴 나를 구속에서 풀어 주기위한 선택을 했다

하고싶은 거 실컷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려한다

내일은 동네 까페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넷플릭스로 영화한편 보는 호사를 누리고자 한다.


이 글은 26.1.9.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에 기사로 게재된 글입니다.

기사는 오마이뉴스에서 수정한 내용으로 올라갔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97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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