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온 든든한 지원군 동생들, 남편의 신난 하루
남편과 나는 퇴직 후 고향으로 귀농해 농사를 지으며 새로운 인생 2막을 약속했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우리는 고향에 같이 있어야 하지만, 여차저차 나의 퇴직이 1년(당초 24년 말 퇴직 예정) 늦어져 남편은 지난 1년간 홀로 지내고 있다. 지난해 연말 퇴직을 했지만, 아직 서울집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어 나는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퇴직하고 이제 3개월이 지났다. 여러 해 더 일할 수 있는데도 조기 퇴직을 해 속내가 좀 어지럽고 복잡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서울에서는 길었던 35년의 직장 생활을 마쳤고, 고향에서는 농사를 시작하며 지난 3개월을 부지런히 도로 위를 누볐다. 내가 서울과 고향을 번갈아 다니며 듀얼라이프(도시와 지방 양쪽에 주거지를 두고 두곳을 오가며 생활하는 두지역 살기)를 하는 동안 짝꿍 없이 혼자 지내는 게 불편할 법한데 남편은 모르는 척해준다. 서울집에 있다가 한번 씩 내려가서는 ‘내가 이번에 다 하고 갈게. 할 일 목록 줘 봐’ 큰소리 뻥뻥 쳤다.
어제(26일) 다시 찾은 남편 곁, 이번엔 뻥뻥 치는 큰소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미뤄둔 일들을 처리해 줄 지원군과 같이 갔기 때문이다. 지원군은 다름 아닌 동생들이다. 귀농을 준비하며 4년간 같이 농사 연습 한 동지들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할 일을 척척 알아서 해내는 든든한 일꾼들이다.
올해 새로 성토(낮은 밭에 흙을 부어 땅을 높이는 작업)한 밭에 그동안 퇴비를 뿌리고, 성토한 흙에서 나온 큰 돌멩이 일부를 골라내고, 농기계를 빌려 흙을 잘게 부수고, 고랑을 만들어 농사지을 준비를 하나씩 했지만, 그래도 잔 손길이 필요한 게 너무 많다. 매일 해야 할 일은 쌓여 가는데 큰 일 하나 끝나면 휙 하고 서울집으로 가는 내가 이번엔 지원군을 이끌고 금의환향한 듯 오니 남편은 어이가 없는지 실소한다.
그렇게 지원군까지 합세한 완전체로 오늘(27일) 우선 할 일은 ‘물탱크를 활용한 자동 관수 설치 작업’과 ‘밭 돌 골라내기’였다.
원래 처음 성토한 흙은 돌멩이가 많다. 그런데 농사를 짓겠다는 땅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아버지 눈에는 영 성가시고 거슬리는 모양이다. 뒤에 들어보니 안부 전화하는 자식들에게 ‘밭에 돌이 많아서 큰일이야…. 오늘도 돌을 골라냈는데 힘이 들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거다.
정작 밭에서 농사짓는 남편과 나는 ‘아버지, 돌은 시간이 지나면 부서지고 다 해결돼요. 올해 농사지으면 내년엔 훨씬 눈에 안 보일 거예요. 걱정을 마세요.’ 늘 돌아오는 대답이 같으니, 다른 자식들에게 하소연하신다. 아버지 성화에 이번 참에 돌을 전부 골라내 볼 작정으로 지원군까지 동원했으니 내가 의기양양할 수밖에….
정말 중요한 작업은 593개의 고추 모종을(지금 하우스에서 모종이 잘 자라고 있다) 밭에 옮겨 심은 후, 점적 호스를 통해 자동으로 관수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주말 텃밭에서 농사 연습을 할 때 점적 호스(호스에 미세한 구멍이 일정 간격으로 뚫려 있어 물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방울방울 흘러나오도록 만들어진 특수 호스)를 사용해 고추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지만, 그때는 지하수가 있어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우선 점적 호스로 관수를 하기 위해 물탱크(농수로에 흐르는 물을 미리 양수기로 퍼 올려 저장해 두었다)와 물탱크에서 물을 내보내는 양수기와 연결된 굵은 배관을 고추가 심을 자리로 연장하고, 고추 고랑 간격으로 굵은 배관에 밸브를 달아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일부 구간만 물을 잠글 수 있도록 설치했다. 그리고 굵은 배관에서 고추를 심는 두둑으로 점적 호스 연결 밸브를 써 호스를 하나씩 연결하는 작업이다.
사실 지난해 이렇게 작업을 해 고추 농사를 지었는데 올해 성토를 다시 하는 바람에 모든 작업은 처음으로 세팅되었다. 올해는 자동 볼밸브 장치를 추가로 설치했다. 자동으로 관수가 되면 좋겠다며 남편이 여기저기 뒤져 궁리한 끝에 나온 발상이다. (참고: 점적 호스로 작물에 관수를 하면 수압을 낮게 유지하면서 물이 방울방울 천천히 흙 속으로 들어가 작물의 뿌리 깊숙이 물이 스며든다.. 더해 큰 장점은 물에 영양제를 타 관비재배가 가능하다)
전자 볼밸브를 설치한 덕분에 지난해처럼 새벽같이 나와 전원을 올리고 일일이 밸브를 수동으로 열어 물주기 하는 대신 집에서 자동으로 밸브를 열어 물주기를 시작해 놓고 천천히 밭에 도착해 모닝커피 한잔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새벽부터 시작한 하루 작업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계속됐다. 남편은 시켜도 말 안 듣는 조수가 한 명(나)이다가, 여럿이 등장해 일을 하니 신이 난 하루였다. 작업을 마치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종일 종종거리며 돌아다닌 밭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온종일 골라낸 돌이 줄어든 밭을 흐뭇하게 살폈고, 남편은 본인이 설치한 관수시스템에 만족했고, 나는 내심 내가 없는 동안 혼자 있었던 남편에게 미안해 ‘여보, 내가 지원군 잘 데리고 왔지?’
그렇게 우리는 인생에 딱 하루뿐인 오늘을 더없이 즐겁게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