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붙임머리에서 알게 된, 아버지와의 ‘관계 리터치’

by 선심화

어제 늦은 밤 귀가한 딸에게 ‘퇴근이 늦었네….’했더니 ‘머리 리터치하고 왔어’ 한다. ‘리터치가 뭐야?’

리터치가 뭐냐는 나의 물음에 딸은 ‘엄마는 말해도 몰라….’ 하곤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한마디에 머릿속이 멍해지고 할 말을 잃었다.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입술이 잠시 달싹이며 한마디하려는 걸 멈췄다. 얼마 전, 긴 머리를 하고 싶다면서 붙임머리를 하고 와 길어진 머리를 보고 신기했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마도 그와 관련된 뭔가를 하고 온 듯했다.

잠자리에 들어 뒤척이며 엄마는 말해도 모른다는 딸의 말이 곱씹어졌다. 어둠 속에서 내내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뭐야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싶다가 다시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나? 그래서 퉁명스러웠나’ 괘씸했다가 한편으론 또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딸이 걱정되는 어쩔 수 없는 엄마의 긴 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미니에 물어봤다. 최근에 붙임머리를 했는데 리터치가 뭐냐고 물어보니 ‘붙임머리 리터치는 본인의 머리카락이 자라면서 아래로 내려온 가짜 머리카락(피스)을 떼어냈다가, 다시 두피 가까운 곳으로 위로 올려서 붙이는 작업’이라고 알려줬다. 제미니가 알려준 리터치를 알아듣고 허탈했다. 별것도 아닌데, 붙임머리를 한 후에 길어진 머리만큼 다시 올리는 걸 리터치라고 하는데, 이 쉬운 걸 설명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엄마는 몰라’ 다섯 글자가 다시 떠오르며 닫힌 딸의 방문과 내 마음의 거리가 더 멀게 느껴졌다.

자란 머리카락은 리터치를 해 다시 올리고 왔지만,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좋았던 우리 모녀의 마음은 다시올린 그 머리카락의 길이보다 더 멀어졌다.

문득 며칠 전 밭에서 아버지와의 일이 떠올랐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 아버지를 위해 밭 일부에 작은 화단을 조성하고 화초들을 옮겨 심은 곳이 있다. 밭일하기 전 나무 테이블에 앉아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버지가 물을 주고 있는 걸 보고 ‘아버지, 새로 심은 화초들이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물을 너무 자주 주면 뿌리가 썩어요’ 이상하게 그때 그 일상의 순간이 마음에 남았었는데 이제 보니 화초를 망칠까 봐 걱정되어 한 말이지만, 아버지가 서운했겠구나, 잔소리로 받아들이셨겠구나, 그래서 내 마음에 잔상으로 그 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60423 오마이뉴스.png AI생성이미지...당시 장면...

나의 간섭에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못 들은 척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겼는데 그 침묵이 내 말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내가 딸 방문을 쳐다보며 한마디하고 싶은 걸 참은 것과 같은 묵묵히 흘려보내 준 마음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그저 당신이 좋아하는 화초가 예쁘게 잘 자라 빨리 꽃을 피웠으면 하는 마음에서 물을 준 것뿐인데 뿌리가 썩을 수 있다는 과한 간섭에 서운하고 괘씸했을 텐데, 그래도 아무 말씀 안 하신 아버지가 눈에 밟혀 죄송했다. 딸의 무심한 한마디에 긴 밤을 뒤척인 내가 정작 아버지에게 타박 섞인 말을 던지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아팠다.


내일 아침, 아버지와 동행하는 여행을 위해 만나기로 돼 있다. 괘씸하고 서운했을 당신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드려야 할지, 아버지는 간혹 막걸리 한잔 후에 ‘딸이 잔소리가 심해’라고 하신다. 그 잔소리라는 세글자, 내 입에서는 나이 든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걱정이라 믿었던 말들이 아버지에게는 간섭으로 들리고 있다는 증거다. 딸에게 무시당한 것 같은 ‘엄마는 몰라’ 다섯 글자와 아버지가 내게 하는 ‘잔소리’ 세글자의 무게가 같다는 걸 이제야 생각하게 된다.

딸의 붙임머리 리터치로, 나와 딸, 나와 아버지의 관계에도 ‘관계의 리터치’가 필요함을 생각하게 됐다. 내일 아침부터 시작되는 3박4일의 여행 기간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잔소리를 꾹 누르고 ‘아버지, 이번 여행은 우리 각자 하고 싶은 거 해요. 아버지 하고 싶은거 다 하세요. 제가 다 따라갈게요.’ 라고 해야겠다.

딸의 말 한마디에 서운했을 아버지의 마음보다 뿌리를 내리지 못할까 봐 화초를 걱정했던 나의 옹졸함에 깊이 반성한다. 이번 여행으로 아버지와의 관계 리터치가 한 뼘만큼 가까워지길, 아버지의 서운함이 한 숟가락 줄어들기를 바라면서 넉넉한 마음을 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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