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기념회 때 피아노 독주회도 해‘ 남편이 응원한다
이틀전(25일) 부지런히 집 안 청소를 마치고 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학원으로 갔다. 학원에 다닌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한 주 동안 복습한 악보 연습을 확인받을 생각에 신났다. 딸뻘 되는 선생님에게 잘했다 칭찬받는 게 은근히 즐겁다.
춥고 시렸던 이번 겨울 ‘퇴직’이라는 무거운 숙제는 나에게 커다란 사건이라고 표현하기도 모자란다. 35년 직장 생활 마침표가(25.12.31. 퇴직) 남은 이들에게는 부럽기도 할테고(지긋한 직장을 떠나는 홀가분함), 아쉽기도 했을 거다.(정년을 4년 남기고 퇴직하니 남은 4년 더 근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퇴직이라는 과정이 쉽지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있고 ‘과장님’으로 불리는 직함이 있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퇴직과 함께 바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있어야 하던 직장이 없어지면서 마주한 허탈감이라는 감정의 후폭풍은 의외로 컸다.
출근해 커피 한 잔 사이에 두고 나누던 업무 얘기, 회의, 선후배와의 소통 시간으로 느꼈던 유대감은 가족의 위로로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굴 붙잡고 하소연한들 채워지지 않는 감정이란 것도 이순(耳順)을 앞둔 나는 잘 안다. 희로애락이 함께한 지난 세월 녹록지 않았어도 잘 살았으니, 지금이 있다고, 오롯이 나를 찾고 나를 아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짐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다짐하고 되뇌어도 순간순간 요동치는 마음은 지켜보는 수밖에..그렇게 파동을 눌러가며 이번 겨울을 보냈다.
그 겨울을 보내며 찾은 하나의 휴식처가 바로 피아노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투박한 두 손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매일 돋보기 걸치고 오타와 문서를 보던 두 눈은 콩나물이 그려진 악보만 본다. 머리는 오직 손가락과 악보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일만 한다. 그러는 사이 뒷머리 잡던 두통은 사라졌고 지끈했던 머리는 사무실 일들을 잊어가며 긴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피아노를 두드리며 연습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연습하는 것도 어쩌면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마쳐야 할 일들을 시간 내 끝내던 오랜 습관이 있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잘하셨어요. 박자도 잘 맞고, 매일 연습하세요?’ 선생님의 칭찬은 나를 춤추게 한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집에 가서 따님이랑 책거리하세요” 책 한 권을 뗐다. 나이 든 수강생을 격려하기 위한 듣기 좋은 얘기일 수 있지만 잘하고 있다는 어린 선생님의 격려에 어깨가 으쓱했다.
집으로 돌아와 새로 받은 2권 책을 자랑하며 짧은 시간에 진도가 많이 나갔다며 기대된다고 하셨다고 전하니 딸이’기대? 피아니스트 나오나요? ‘한다.
남편은 ’출판기념회 때 피아노 독주회도 해‘ 앞으로 책을 써 가족들을 모아 출판기념회를 하겠다고 허풍떠는 마누라를 진심으로 응원해 준다.
’한복 입고 피아노치고 책 소개하고, 울진문화원에서 해야겠다‘라고 화답했다
퇴직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인생 2막을 응원한다’였다. 왜 인생 2막이라고 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수십 년간 생계를 책임진 의무적 노동의 시간을 1막으로 본다면, 다른 방향의 삶을 시작하는 또 다른 2막의 경계지점이 ’퇴직‘이다. 누구나 정해진 수순으로 다가오지만 어떻게 2막을 시작하는지에 따라 남은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 방향키는 내 손에 쥐어져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레빈슨(Daniel Levinson)은 인생을 사계절로 비유하고 있다. 봄(성인 이전기 0~22세), 여름(성인 초기 17세~45세), 가을(중년기 40~65세), 겨울(노년기 60세 이후), 큰 계절이 바뀌는 중간중간 흔들리는 시기(전환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다음 계절에 맞는 인생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했다.
나는 지금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전환기에 서 있다. 거스를 수 없는 다음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내 손에 쥐어진 방향키를 잘 잡고 있어야 한다. 지나간 삶에 대한 그리움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고마운 삶으로, 남이 나를 보는 시선보다는 내가 나를 보는 시선으로 관점을 바꾸는 전환기에 피아노는 내 손에 쥐어진 방향키의 고급 윤활유다.
허풍으로 떠드는 출판기념회와 독주회가 다음 계절에 있을 수도 있다. 그 계절을 기다리며 전환기라는 터널을 또 한번 잘 지나가보겠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1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