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죽는 날.

2007년 봄.

by 캐나다 부자엄마

2007년 봄.


유치원 퇴근을 했다. 집 근처 이마트에 들렸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지 않는다. 칼과 소주만 있으면 되니까.


제일 싼 칼 한 자루와 팩 소주 하나를 사자. 그거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비교를 한다. 어떤 것이 제일 쌀까? 노란색 세일 딱지가 붙은 칼과 제일 싼 소주팩을 골랐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 플라스틱 장바구니에 칼과 소주 한팩을 넣었다. 그것들이 노란색 플라스틱 장바구니 여기저기 뒹굴거린다. 만약 누구라도 이런 것을 왜 사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계산대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구라도 잡아주길 바랐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이제는 괜찮아요?’


뭐 그런 말들. 죽으려고 했지만, 왠지 자신은 없다. 그런 이유에서 팩 소주를 하나 샀다.


술은 못 마시는 나였다. 그래서 팩 소주 하나면 되었다. 돈을 아낄 수 있어 다행이다. 캐셔 아주머니는 기계적으로 칼 한 자루와 소주 한 팩을 바코드로 찍는다.


“봉투 필요하세요.?” 얼굴만 있고 표정은 없는 그녀가 물었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렸다. 가방 지퍼를 열고 칼 한 자루와 소주 한팩을 넣었다.


아무도 나를 잡아주지 않는다. 아무도 내가 괜찮은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래 사람들은 저마다 삶이 바쁘지.


등에 맨 가방 안에서 칼 한 자루와 소주 한 팩이 걸을 때마다 동동거린다. 마치 물속에 빠진 병처럼 동동. 나를 건져내줘. 동동거린다. 슬픈 것들을 잔뜩 가방에 담아 이마트 밖을 빠져나왔다.



이마트에서 우리 집은 금방이었다. 할머니와 나. 단 둘이 살고 있는 영구 임대 아파트.


노란 옥수수 알갱이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복도식 아파트 문을 지난다. 옆집 아저씨는 항상 문을 열고 있었다. 처음 샀을 때는 흰색이었을 지금은 누레진 메리야스에 사각팬티를 입고 있는 아저씨.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려 든다. 흉한 것을 보지 않으려는 듯 자동적으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 집에서는 며칠이고 큰소리가 났다.


복도 맨 끝, 오래되어 색이 바랜 연세우유 봉지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우리 집으로 간다. 철컥 차가운 철 열쇠를 문 손잡이에 넣는다. 왼쪽으로 돌려 열쇠를 뺀다. 문이 열린다. 할머니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내 방의 문을 열었다. 등에 맨 가방이 스르르 방바닥으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철퍼덕.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이마트에서 사 온 칼. 소주를 가방에서 꺼냈다. 플라스틱 보호대 안에 있는 칼을 잡아본다.


“아. 안 열리네.”


칼을 감싸고 있던 플라스틱 껍데기가 제법 단단했다. 주방으로 간다. 주방가위로 플라스틱 껍데기의 윗부분을 잘랐다.


그제야 칼이 잡힌다. 칼은 컸다. 차가웠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늘은 꼭 죽어야 돼.’


내가 나에게 말한다. 무서운데. 두려운 마음이 풍선처럼 커질 무렵 옆에 있는 팩 소주를 집어 들었다. 팩 소주 옆, 붙어있는 빨대를 떼낸다. 톡, 빨대를 떼서 비닐을 벗겼다. 작은 은색 구멍에 콕하고 빨대를 집어넣었다.


숨을 참고 한 모금 깊게 팩 소주를 빨아들인다. 고등학교 때 개구리 해부한 적이 있었다. 개구리 몸을 닦았던 알코올 냄새가 났다. 맛도 그랬다. 기분 나쁜 맛. 죽는 마당에 맛을 느끼는 내가 어이없었다. 소주 한 팩을 다 마시기도 전 머리가 어지러웠다. 술기운이 올라왔다.


‘안돼. 할 건 해야지.’


칼을 집어 든다. 망설이면 겁은 더 커진다. 칼을 천장 높이 들어 올린다. 술기운에 용기를 낸다.


걷어 놓은 왼쪽 손목 위로 칼을 내려쳤다. 무서워서 두 눈을 있는 힘껏 다해 꼭 감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꽉.


‘미안해 미안해. 나는 죽어야 되니까. 미안해. 미안해.’ ‘빨리 죽어줘.’


내가 나에게 사과를 한다. 내가 나에게 부탁을 한다. 슬퍼.


아프다. 눈을 감고 내리친 칼이 손목뼈에 맞았다. 뼈에 맞아서인지 툭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곧 빨갛게 벌어진 살 틈 사이로 피가 벌벌거리고 기어 나온다. 그걸 한참이나 보고 앉아 있다. 이만하면 죽어야 했다.


나는 죽어야 하는 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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