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람중동] 페르시아를 살린 지정학 - 1
우리는 국가를 이미지로 저장합니다.
역사적 사건, 정치적 인물, 그리고 음악이나 음식 같은 문화의 일면을 곧 그 나라 자체로 인식하죠.
그런데 사실 그 이미지란 게 별게 아니기도 합니다.
우리 뇌리에 처음 닿은 인상을 오랫동안 묵혀둔 고정관념일 수 있고 세간의 평가에 동화되면서 이식된 감정일 수도 있죠. 힘이 세면 좋은 나라, 우릴 도와주면 더 좋은 나라. 그 좋은 나라를 괴롭히면 나쁜 나라. 이런 생각도 합니다.
바뀔 일은 잘 없습니다.
그 땅에 직접 가서 체험하거나 혹은 스스로 꽤 열정적으로 탐구해서 그네들만의 배경과 이유 또는 행동의 맥락을 세세하게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한번 저장한 이미지는 계속 갑니다. 부정적인 것이라면 더욱 그렇죠.
악의 축? 중동의 문제아?
이란을 문제적 국가라고들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세계 사회에 큰 소란이 일어날 때면 대개 이란이 껴 있죠.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합니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인류의 흔적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역사의 땅이자 세계를 아우른 페르시아 제국의 자부심이 서린 이 나라는
ⓛ 언제부터 악의 축이자 문제적 국가가 돼버린 걸까요?
② 또, 주변에서 밀려오는 적대감과 강력한 제재 속에서도 그들이 오늘날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비롯됐는지 궁금합니다.
오늘은 지정학적 시각에서 이란의 실체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혹시 이미 저장해 둔 이곳의 이미지가 있다면 잠시 내려두어도 좋습니다.
Ⅰ. 일곱 개의 국경
이란은 여러 나라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입니다.
동쪽에는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위로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서쪽에는 튀르키예. 그리고 바로 옆에는 애증의 이라크가 있죠.
일곱 개의 국경을 관리한다는 건
외교 안보적 긴장과 피로도가 그만큼 높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현대 국가들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그랬죠. 유라시아와 중동, 서방에서 이 땅을 끊임없이 넘봤으니까요.
역사를 뒤흔든 정복자들과 여러 제국들, 또 왕조들이 페르시아를 노렸고
이 땅의 민족들은 수없는 외침을 겪어왔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땅의 주인이 바뀌지는 않았죠. 아리안들이 시작한 이란의 역사는 오늘까지, 같은 곳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국의 교차로에서 이란은 스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힘, 그 원동력은 어디서 비롯됐을까요?
지정학적 특징이 큰 몫을 했습니다. 이란 땅을 둘러싼 장엄한 산맥과 이어지는 고원, 내륙의 험준한 사막 지대가 이 땅을 요새화한 거죠. 흔히들 '이란고원'이라고도 하는데요.
오늘은 이란을 둘러싼 세 개의 산맥을 기준으로 이 나라의 지정학적 특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북쪽 엘부르즈산맥부터 보죠.
Ⅱ. 엘부르즈, 테헤란의 방벽
엘부르즈(Alborz Mountains)는
이란 북부와 카스피해 남부를 가로지르는 산맥입니다. 수도 테헤란을 위로 덮으면서, 카스피해 남쪽을 따라 동서로 900km 정도 길게 뻗어있죠. 이란에게 있어서 이 엘부르즈는 테헤란을 방어하는 천혜의 방벽입니다. 특히 카스피해 북쪽, 초원이 펼쳐진 스텝 지역 민족들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해왔죠.
엘부르즈의 기후는 남북으로 극적인 차이를 보이는데요.
북쪽 방면은 카스피해의 영향으로 습합니다. 그만큼 땅이 비옥하고 숲은 울창한 편이죠. 덕분에 이곳에서는 목재와 임산물이 주요 자원으로 나옵니다. 또, 카스피해 연안에서는 사과와 감귤. 벚나무 등이 출하되기도 하죠. 반면 엘부르즈 남쪽, 테헤란 방면은 이란고원과 연결되면서 건조한 기후가 펼쳐집니다.
이 엘부르즈산맥이 유명해진 것은 만년설 덕분입니다.
엘부르즈 능선에서 가장 높은 산은 '다마반드 산'인데요. 테헤란에서 50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이 산의 높이는 5,600미터로 이란에서 가장 높고, 중동을 포함해도 최고봉 그룹에 속합니다. 포털에 테헤란을 검색했을 때 빽빽한 도심 뒤로 보이는 설산이 바로 엘부르즈, 다마반드죠.
만년설을 품은 다마반드는 지난 동계올림픽(2022) 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올림픽에 출전한 이란 스키의 선수는 세 명. 그중 여성은 아흐마디가 유일했는데요. 그녀는 매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란에도 눈이 오냐고 물어보는데
아마 이란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사막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연습은 테헤란의 다마반드 산에서 했다. 해발 5,600m인 그곳에는 빙하가 있다."
그녀는 이 인터뷰를 통해 이란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란에서도 종교, 여성, 스포츠가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후적 측면, 다시 말해서 이란은 사막이 아니고 아랍도 아니라는 사실 말이죠.
사실, 이란이 사막 기후부터 아열대 기후까지 품고 있는 나라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겁니다.
Ⅲ. 이란의 정신적 지주
설산을 품은 엘부르즈산맥은 이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고대부터 이란 사람들은 산을 신성하게 여기면서 의미를 부여했는데요. 수도 테헤란을 방어하는 요새라는 점, 그리고 민족의 신화와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점이 엘부르즈와 다마반드 산을 성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이란 문학에서 엘부르즈는 불변성과 굳건함을 나타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외세에 맞서는 민족의 자긍심, 불굴의 정신을 이야기할 때 엘부르즈가 배경으로 등장할 정도죠.
이 산의 영험함은 오래된 페르시아 신화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화 속 다마반드는 영웅적 사건이 일어나고 정의가 구현되며 악의 세력이 굴복하는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여기서는 조로아스터교의 스토리도 빠질 수 없는데요.
이란에서 태동한 조로아스터교는 극한 이분법적 세계관, 즉 선 vs 악의 대립을 쟁점으로 합니다. 그 전승에 따르면, 이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악마(아흐리만) 막고자 신적 존재가 악마와 전쟁을 치렀고, 결국 그 절대자가 악마를 봉인했다고 합니다. 바로 다마반드 산 정상에 말이죠.
즉, 조로아스터교에서 엘부르즈는 선과 악의 우주적 싸움에서 승리한 아주 신성한 곳입니다.
이후, 페르시아의 역사를 이어온 왕조들도 이곳을 전략적 요충지이자 민족의 성산으로 각별히 여겼죠.
민족의 정체성과 운명이 담긴 엘부르즈의 정체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