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과 증언 사이에서
<사서(四书)> 옌롄커
"저는 늘 제가 처한 환경에 맞는 출판이 아니라 제 현실을 반영하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소망해 왔습니다. 그리고 사서(四书)가 바로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써 모든 구애에서 벗어나려 했던 제 도전의 산물입니다."-옌롄커 사서 서문 '글쓰기의 반역자' 中
소설을 ‘십자가에 매달린 인간 존엄이 외치는 구원의 호소’라 이야기한 작가 옌롄커의 책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속 서문을 기억한다. 이 서문은 '사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작품은 성경 속 창세기 모형을 차용하여 신이 세상을 만들어 십계를 내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기독교적 세계관 속 신과는 다르다. 그는 할당량을 강요하고, 이를 채우지 못하면 벌을 내리며, 강철 생산을 요구한다. 성경의 구조를 빌린 이 장치는 국가 담론이 절대 권력과 결합할 때 어떻게 종교적 광기로 변질되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약진운동 시기 강철 제련을 강조하며 산림을 베어내도록 지시했던 마오 주석의 모습이 겹쳐진다. 작품 속에는 지식인들의 사상교화소, 위신구 99구가 등장한다. 이곳에는 음악가, 교수, 학자, 작가, 종교인 등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끌려온 인물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상부에 대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아이'의 지도 아래 신이 정한 목표를 달성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을 믿고 노동을 한다. 겉으로는 자발적이지만, 실상은 생존을 위해 정체성을 포기한 채 사는 삶이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 쓰기보다 남을 고발하는 죄인록을 통해 다른 지식인을 밀고하고, '종교'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굶주림과 추위 속에 신을 모독하며, 다른 수많은 지식인들은 대기근 앞에서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는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독자들은 지식인들의 신념이 조건과 환경 앞에 얼마나 철저하게 무너지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는 '인간의 존엄은 조건과 환경 앞에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존엄을 지키는 인물이 있다. ‘학자’는 무너지는 지식인들 앞에서 분노하고, 다독이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존엄을 놓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는 작품 속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 안에 마지막 기준이 남아 있으리라 믿고 싶은 독자에게 '학자'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반면, '작가'는 상황에 따라 작가로서의 사명을 버리고 동료 지식인들까지도 밀고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사서 속 네 권 가운데 세 권을 쓴 이 두 인물의 대비는 작품의 핵심 질문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작가가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자각하며 “우리가 지식인이라는 것을 잊었소!?”라고 외치는 순간, 이 작품은 단순한 각성이나 구원 서사를 넘어선 옌롄커의 자기 고백이자, 증언으로 전환된다.
옌롄커는 자신 역시 문화대혁명 세대이자 28년간 군에 복무한 인물로서, 그 시대에 대한 일정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그 시대를 통과한 자신을 체제에 협력하고 공모한 존재로 형상화하여 작품 속 ‘작가’라는 인물에 투영한다. 작품 속에서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죄책을 이야기하지만, 책을 덮은 독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망명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검열과 금서 속에서도 글쓰기를 이어온 옌롄커의 모습은 오히려 ‘학자’에 더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자기 심판을 하듯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학자의 태도는, 가해자로 보이는 아이 역시 국가가 주입한 담론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광기와 폭력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피해자임을 드러낸다. 또 이러한 상흔이 남은 역사 속에서 어느 누구도 완전히 단죄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함께 환기된다. 비록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는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책 속에서는 세대적 죄의식이 문학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옌롄커는 마치 우리에게 “나는 그 시대에 완전히 무고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 체제 속에 남아 현실을 끝까지 증언하려 한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학자를 통해 서술한 옌롄커의 시대적 사명과 의식은 액자식으로 수록된 시시포스 신화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형벌을 받던 시시포스는 아이를 사랑하였고, 신은 그가 스스로 사유하고 자각했다는 이유로 둘의 만남을 금지하는 형벌을 내린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도 그는 사유를 멈추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며 그 안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낸다. 형벌은 끝나지 않지만, 그는 그 구조 속에서 ‘감각하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엄의 최소 단위를 의식적으로 붙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서문 속에서 언급한 인간 존엄의 흐느낌이자 고독과 증언의 기록으로 읽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학자의 손을 빌려 액자식으로 구성한 것은 옌롄커가 체제 밖에서 외치는 인물이 아니라 체제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환경은 바꿀 수 없고, 형벌은 끝나지 않는다.조건조차 여전히 부조리하다면, 그 안에서 계속해서 쓰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의식적 선택이 된다. 이것이 그가 이야기하는 존엄의 최소 단위인 것이다. 그는 혁명을 일으키고 변혁을 구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그 과정은 고독하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독자에게 외치는 듯하다.
그는 썼고, 그의 고독은 독자인 나에게 도달했다. 잘못된 구조는 바꿔야 하고, 부조리는 제거해야 하며, 억압은 깨뜨려야 한다는 의식 구조 속에 살아온 나에게, 이 책은 체제 안에서 사유라는 존엄을 지키며 고독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지속하는 것 역시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독에 대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메리 바턴' 속 한 문장을 곱씹는다.
"이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뭔가 해야 하네."
나에게는 여전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마음, 고통을 알았으면 움직여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옌롄커의 고독한 증언을 이해했고, 체제 안에서 존엄을 지키는 지속의 의지를 보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여전히 “우리가 뭔가 해야 한다”는 마음이 살아 있다. 하지만 이전의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 무가치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달라진 것은 대단한 저항이나 투쟁만이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을 뿐, 말하는 것과 기록하는 것, 의식이라는 존엄을 잃지 않는 일 역시 이미 행동이었다. 작가의 고독을 알게 된 지금, '사서'는 나에게 눈물의 책이 된다. 부조리 속에서도 사유를 멈추지 않겠다는 한 작가의 조용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 함께 들을 곡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8번 2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