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책임 사이에서
<메리 바턴> 엘리자베스 개스켈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알 길이 없다는 고리타분한 말은 꺼내지도 마. 모른다면 알아야지. 우리는 노예처럼 그들을 위해 일해. 우리의 피와 땀으로 그들의 재산이 불어나지만 그들과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
이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은 분명하다. 타인의 고통을 '몰랐다'는 이유로 그에 따른 비극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산업 혁명기 멘체스터를 배경으로, 메리의 사랑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고통과 노사 갈등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플롯과 직접적 서술로 비극적 사건을 연속적으로 제시하지만, 개스켈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오롯이 마주하게 한다. 희미한 따뜻함과 연민이 깔린 문체는 비극 속에서도 인물의 희망을 느끼게 한다.
작품은 노동자를 단순한 주변 인물로 다룬 것이 아닌, 직접 노동자 계급을 인물로 내세워 당시의 계급 갈등을 서술해 나간다는 점에서 다른 가치를 지닌다.
표면적 스토리는 메리바턴의 사랑 이야기이자, 성장소설 같지만 노동자들의 처절한 현실과 그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는 상위 계급을 조명한다. 작품의 각 인물들은 당시 계층을 대표하며, 이 인물들은 단일한 노동자 계층이 아니라 다양한 하층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특히 작가의 생각 대부분이 존 바턴이라는 인물을 통해 대언된다는 점에서 존 바턴은 작가의 문제의식을 가장 밀도 있게 구현하는 인물로 기능한다.
중산층 계급에 속한 개스켈이 노동자 계급의 삶을 주요 소재로 선택했다는 점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개스켈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좌절을 직접 목격하며, 유니테리언 목사의 부인으로서 지닌 신앙적 양심과 도덕적 책임을 바탕으로 이를 문학적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사명은 작품 전반에 내포된 '몰랐다는 이유로 가난에 대한 책임을 상위 계급이 면제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구체화된다.
작품은 굶주리는 노동자와 부를 향유하는 고용주를 대비해 보여줌으로써, 당시 영국 사회에 고착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착취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고용주가 부를 축적하는 동안 정작 자신들의 삶은 악화되는 현실을 목격하며, 경제 불황으로 인한 악영향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에게 전가되는 상황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의 고통에 대한 무지로 인해 발생된 문제일 것이라고, 알게 되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좌절되고 결국 파업이라는 집단적 저항으로 이어진다.
당시 공장주들 중에는 노동자 계층에서 올라온 사람도 있고 그 현실을 본 사람도 있었기에 하위 계층의 고통을 모를 수가 없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임금을 달라는 노동자의 요구조차 불경기라는 이유로 무시해 버린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빈곤이 과연 단순히 노동자 개인의 책임일까? 작가는 한편으로 자신도 불행한 처지에 있음에도 더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고귀한 희생을 자처하는 이들 역시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인간 내면의 선함에서 우러나온 계급 간의 연대로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진다.
"이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뭔가 해야 하네."
연대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이것이 작가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개스켈은 기독교 정신에 기반하여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의 상호 이해를 바란다. 하지만 이들을 같은 고통이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저들은 우리를 쥐어짜서 가장 비참한 계급으로 떨어뜨렸어. 현실이 이런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나?"
"지금은 고용주들도 고통을 겪고 있어."
"그들의 자녀 중에 굶어 죽은 아이가 있나?"
서로 이해하라고 하기에는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 자체도 향유할 수 없는 빈곤 앞에서 양쪽이 겪는 고통의 정도는 빈부격차만큼이나 간극이 크다. 그런 그들에게 서로를 이해하고 존경과 애정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개스켈의 관점은 노동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비대칭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개스켈의 대안은 너무나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작품은 가난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 책임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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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 3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