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과 용서 사이에서
<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굽이치는 자연을 뚫고 지나간 그 길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이었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은 짓들과 그녀가 겪은 불행이 아마도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표지가 마음에 든다는 점이 책을 선택하는 이유가 될 때가 있다. 단발머리에 미인이면서도 길게 강조된 코를 가진 키티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듯한 표지는 게오르그 람베르그의 '헤라'를 차용하고 있다. 외도의 당사자인 키티와 제우스의 본처인 헤라가 표지로 보여진 것은 의도된 아이러니였을까. 이렇게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독자를 끌어당기는 플롯을 통해 윤리적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끝내 나에게 가볍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인물의 내적 변화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기능을 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초반부 영국은 전통적인 가치관 속에서 가식과 허영으로 점철된 왜곡된 키티의 가치관이 형성되는 공간으로 제시된다.
반면, 메이탄푸는 이러한 허영과 자기 환상의 베일이 벗겨지고 내면의 공허와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귀환한 영국은 과거와 동일한 장소이지만 모든 기만과 환상이 벗겨지고, 키티가 변화된 인식 상태로 미래를 감당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획득한 공간으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서머싯 몸은 실제로 성공적이지 못한 결혼생활로 이혼하고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이때의 그의 중국 체류 경험은 작품 해석에 하나의 단서로 작용할 수 있다. 그는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자기기만적 욕망이 아닌 고귀한 희생과 봉사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면서도, 그러한 깨달음 이후에도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을 키티를 통해 보여준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인 키티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 자신의 실패와 자아 대면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투사하며 문제의식을 드러내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실패한 결혼 생활을 시대적 맥락과 결합시켜 묻는다. 전통적 가치관을 벗어나, 실수 속에서 스스로를 직면해 가는 여성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지.
삶과 죽음 앞에서 깨달음을 얻은 키티에게는 자신의 간통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월터의 증오가 오히려 그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고 그를 위해 '용서'를 말하려 할 때, 독자는 멈칫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간통한 아내와 상처 입은 남편이라는 전형적인 윤리 구도는 해체되고, 월터는 도덕적 심판자라는 위치에서, 하나의 불완전한 인물로 조정된다. 그러나,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뒤 자신의 깨달음을 근거로 관계의 회복과 용서를 말하는 것이 용납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키티의 용서에 대한 불편한 언급이, 그리고 용서를 하지 못한 월터의 죽음이 수용하기 어려운 지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에도 각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는 다르다. 내가 키티의 용서에 대한 필요나, 반복되는 실수보다 모멸감을 느낀 월터의 외면이 더 이해가 되는 것은 서머싯 몸이 기대한 동의와는 다른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는 숭고한 사명을 감당하지만 거리감이 있는 수녀들, 끝까지 용서 못하는 월터, 허영을 상징하는 찰스, 전통적 가치관 속에 살다가 죽은 어머니 등 키티를 포함한 많은 불완전한 인물들이 나온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을 모두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결국 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저마다의 결함을 안고 있는 인간과 결혼 제도에 대한 그의 고찰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일 수 있다. 허영적 자기기만 속에 있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의 행위는 비난할 수 있지만, 차마 그 인물 자체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허황된 각자의 환상 속에서 어쩌면 인생의 베일을 걷어내지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함께 들을 곡
에릭 사티(Erik Satie) Gnossienne 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