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2) 힘 빼기
지금 돌이켜 보면 대학시절의 나는 아팠다. 타인에 대한 집착이 병적이었다. 스토킹 같은 집착이 아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집착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남에게 말이다. 그것도 과하게.
나의 답장은 기본 세 줄이었다. 툭하면 ‘전체 보기’ 버튼이 생길 정도로 길었다. 답장에 사랑과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면 상대방은 좋아했다. 그러면 나도 좋았다. 하루에 연락하는 인원이 인스타그램 DM만 최소 12명이 넘어갔다. 인스타 연락에 모두 답장하고 나면 카톡이 남았다. ‘BeReal’이라는 메신저에도 답장해야 했다. 답장을 끝내면 보통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정말로 진이 다 빠졌다. 이러니 주변에 친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내 속도 곪아가고 있었다. 비정상적이었다. 비정상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하루가 끝날 땐 항상 내 언행을 복기했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할 여지가 있었다면, 그 상황은 몇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 머물렀다. 이 고통은 결국 사과하기 위해 휴대폰을 다시 켜야 끝났다. 인생의 초점은 내가 아닌 타인에 가있었다. 나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시기는 하루라도 일찍 본가에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학기가 끝나도 서울에 며칠 더 머물면서 친구들과 놀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친구가 싫었던 것이 아니다. 친구들은 여전히 소중했다. 내가 문제였다.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자마자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대학을 다닐 때에는 몰랐던, 내 머리 위에 달린, 무거운 추가 본가에 내려오자마자 나를 찍어 눌렀다. 메신저에는 친구들의 메시지로 가득했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답장할 수 없었다. 사실 메신저조차 실행할 수 없었다. 힘이 없었다. 그렇게 거의 반년 동안 집에만 박혀 폐인 같이 지냈다. 어느새 친구들에게 나는 ‘원래 연락 잘 안 받는 애’가 되어 있었다. 물론 친구들은 나를 기다려줬다. 나를 손찌검하고 욕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런 낙인이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그렇게 나는 복학하지 않았다. 공군에 입대했다.
군대에서 정말 소중한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훈련소, 특기학교, 자대 동기들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소대에 배치받고 나서부터는 독특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아, 앞에서 운을 다 써버렸구나.” 물론 좋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동기와 후임들이었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 독특한 선임들이 사실 나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인간이라면, 계급이 주어졌을 때 지독해지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에게서 큰 환멸을 느꼈다. 원래도 느끼고 있었지만, 더 확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두에게 예쁨 받을 필요가 없구나. 모두에게 사랑 받을 수도 없구나.” 나아가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오히려 내가 잘 살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지표로 삼으면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타인이 중심이었던 나의 세계는 이렇게 내가 중심이 되었다.
답장 방식도 바뀌었다. 예전엔 대화를 끝내도 내 말풍선으로 종료되는 것이 더 편했다. 이제는 굳이 할 말이 없으면 답장을 하지 않는다. 애써 장문으로 답장하던 습관도 버렸다. 사랑과 진심을 꾹꾹 눌러 담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온다. 그리고 온라인 메신저 대화보다 직접 대면했을 때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온라인 메시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는 굳이 잘 지낼 필요가 없다. 이 짧은 인생은 소중한 사람들과만 함께해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마음 가는 사람에게 더 많이 표현하면 된다. 더 많은 시간을 쓰면 된다. 나랑 맞지 않는 사람에게 달갑지 않은 소리를 들어도 쉽게 마음 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합리적이라면 받아들여야 바람직하지만, 내 가치관과 맞지 않는 사람의 조언이라면 보통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조언자를 좋아하지 않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나를 더 사랑하고 더 믿어주자. 내가 불쾌했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모두에게 사랑 받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 비정상이다. 내 세계에 내가 온전히 서있는 사람이라면, 소신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내 소신과 반대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당연히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남들에게 미움받아도 내 소중한 사람들이 날 좋아한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불편함을 견뎌야 온전할 수 있다.
그렇다고 회의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처음 만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다. 백지의 도화지로 보기보다 엄청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다. 난 여전히 인간을 싫어하는 만큼 인간을 좋아한다. 다만,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맞출 필요 없다는 것과 그런 사람에게 상처 받을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이 점이 예전에 비해 유일하게 달라진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너무 미워하진 말자. 이 글의 요지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 너무 상처 받지 말자는 것이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싫어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운 감정은 그 사람이 틀렸다기보다는 나와 맞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 사람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는 데 감정을 허비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또한 누군가와 적이 되면 득보다 실이 많은 것 같다. 짧은 인생이지만 그렇게 느꼈다. 미운 사람이라도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해주면 좋다. 우리 조상도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물론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다. 그저 거리를 두면서 유보하면 된다.
슬프게도 우리는 미운 사람과 계속 봐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때는 거리를 두기 쉽지 않다. 필요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오래 봐야 하는 경우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연민’에 있다. 그 사람을 불쌍하게 보는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정서적 거리는 확보할 수 있다. 군대에서 많이 써먹었다. 하루 종일 함께 지내야 하는 곳. 잠잘 때조차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곳. 소중한 휴가 없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곳. 그 폐쇄적인 공간에서 버티기 위해 익힌 기술이었다.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불쌍하게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화가 가라앉은 경험은 보다 유익했다.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그 미운 사람과 아무리 마주쳐도 여유로울 수 있었다. 불편함을 제거할 순 없어도 완화할 순 있었다. 연민으로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좋아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좋아해 버리면 된다.’ 연민과 이를 조화롭게 써먹으면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실제로 나는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잘 지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상대방의 좋은 면도 눈에 보였다. “맞아, 저런 모습도 있는 친구였지!” 연민은 화해할 준비도 도와줬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면서 말이다. 군대는 분명 특수한 경우이다. 군대만 잘 버티면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까? 직장도 마찬가지이다. 군대는 법으로 자유를 제한한다면, 직장은 경제적으로 강제한다는 차이밖에 없다. 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이직이 쉬운가? 어쩌면 더 가혹할지 모른다. 형식적으로는 자유롭지만, 실질적으로 강제적인 상황은 더 비참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직을 한다고 해서 그곳은 천국일까? 결국 불편함을 견디는 요령을 터득해야 한다.
다같이 살아가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언제 어떻게 나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쓸모’를 계산하기엔 너무 조악한 존재다. 심지어 너무 싫어했던 친구가 미래의 절친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세상 일은 감히 인간이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싫어하는 사람도 그저 유보하는 것이다. 다만, 남에게 큰 상처를 받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에 집중할 수 있다면, 이 불편함도 견딜 만할 것이다. 이렇게 균형을 잡으며 불완전함을 유지해야 나로 온전해질 수 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완전함으로는 나로 충만해질 수 없다.
1편과 2편을 종합해 보자면, 인간관계는 나와 타인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그 균형점은 인간마다 다르다. 타인에게 치중하면 인기가 많아질 수 있다. 대신 나에게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이야기를 1편에서 다뤘다. 반대로 타인에게 집중된 초점을 나에게로 끌어오는 이야기를 2편에서 다뤘다. 인간관계는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직접 부딪히면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필연적으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고통을 견디고 비로소 건강한 인간관계를 달성할 당신을 응원하면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