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이 만드는 공정성

2장 세상이 규정되는 원리 (4) 언론의 공정성

by 승현

편향이 만드는 공정성


분명한 의식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이전의 두 게시글 전문을 읽어 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두 개의 글을 짧게 요약해 보았다.


<데스크의 성찰을 바랍니다> 요약본

조국 사태부터 한겨레는 성역 없이 권력을 비판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데스크는 기사 내용을 현장의 목소리와 정반대로 편집하기까지 했다. 정파적 저널리즘을 조국 재판부의 물의 야기 법관 해당 여부, 검찰총장 직무 배제 집행정지 신청 인용, 김학의 불법 출국 금지 인용을 다룬 한겨레 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심지어 이러한 편들기식 보도는 이용구 차관 관련 검찰 수사 지침에 대한 기사에서 오보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크는 젊은 기자들의 호소를 식견이 없다는 이유로 반영하지 않았다. 소통하지 않았다. 좋은 저널리즘이란 ‘특정 정파나 좌우 진영 가릴 것 없이 공정한 잣대로 보도하는 것’이다. 훼손된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국장단과 사회부장, 범조팀장은 해당 기사와 사설에 대한 경위를 밝힌 뒤 그에 따른 합당한 책임을 지고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


<데스크의 성찰을 바랍니다>를 이보다 더 짧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성역 없는 비판이 곧 공정이고, 정파적으로 편향된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한겨레의 불통 데스크’는 당장 젊은 현장 기자의 의견을 반영하여 현재의 불공정한 저널리즘을 복구해야 한다.” 즉, 이들이 지적하는 문제는 딱 두 가지인 것이다. 첫 번째는 한겨레의 데스크가 진영 논리에 묻혀 ‘불공정한 저널리즘’을 실천하고 있다는 문제이고, 두 번째는 현장 기자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이러한 저널리즘을 오히려 찍어 누른다는 문제이다.


<젊은 기자들의 성찰을 바랍니다> 요약본

비판의 칼은 상대와 상황을 봐가면서 공정하고 균형 있게 휘둘러야 한다. 공정성에 대한 젊은 기자들의 생각은 더 넓어져야 한다. 모든 권력을 무차별적으로 찌르는 ‘성역 없는 비판의 칼날’은 ‘망나니의 미친 칼’에 불과하다. 이런 저널리즘, 즉 ‘특정 정파나 좌우 진영 가릴 것 없이 공정한 잣대로 보도하는 저널리즘은 절반만 좋은 저널리즘’이다. 이 반쪽짜리 저널리즘의 위험성은 출입처 제도의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친검’ 또는 ‘친법조’ 기자처럼 쉽게 도구화되고 편협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젊은 기자들의 비판도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다만, 추미애 장관의 무리한 징계 절차를 비판하기 전에 윤석열 검찰총장의 선택적 수사의 불공정성에 대해서 먼저 따져봐야 했고, 이용구 차관의 잘못을 비판하기 전에 검찰 기소와 수사의 맥락이 과연 정당했는지 우선 고려해야 했으며,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사건의 절차적 정의에 집중하기에 앞서 그에게 적용되어온 법의 잣대가 예외적이진 않았는지 살펴봤어야 했다.

그리고 한겨레는 어떤 정당이나 진영을 지지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고 큰 진실을 고려하는 저널리즘을 실천해 왔다. 때로는 이것이 친정부적 입장으로 표현될 순 있다. 하지만 결코 정부를 지지할 목적으로 보도를 하진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개별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젊은 기자들은 찍어 눌렀다고 표현하기 전에 데스크의 역할과 언론의 기본적인 체계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해 보인다. 또한 한겨레가 추구하는 저널리즘과 크게 다른 저널리즘을 요구하고 싶다면, 이는 소통과 조율의 영역을 벗어났으므로 본인에게 맞는 언론사로 이직하는 것을 권한다.

2019년의 성명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한 당시 지도부에 책임이 크다. 그다음 들어선 지도부도 여전히 눈치만 보고 있다. 윗선은 현장의 목소리가 합리적이라면 수용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젊은 기자들도 요구 사항이 한겨레와 어울리는지, 이런 방식으로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반성해야 한다. 이제라도 치열하게 논쟁하여 바람직한 결론과 성장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


중역 기자들은 <젊은 기자들의 성찰을 바랍니다>라는 글을 작성하여 이 두 비판점을 노련하게 받아쳤다. 우선 공정성이란 권력이라고 해서 무차별적으로 칼질해서 도달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고 반박하며, 상대와 상황을 봐가면서 칼을 휘둘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젊은 기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공정성 또는 저널리즘은 편협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어 한겨레의 저널리즘은 진보적 가치와 큰 진실을 추구해왔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특정 진영을 지지하기 위해 보도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첫 번째로 제기된 문제점을 해소했다. 불통의 문제의 경우 저널리즘 수정에 대한 현장 기자의 요구 수준이 과도하다고 비판했고, 찍어 누르는 행위에 대해서는 데스크의 역할과 언론의 기본 체계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받아쳤다. 두 번째로 제기된 문제점에 대해서도 쉽게 반론한 것이다. 그리고 치열한 토론이 건설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젊은 기자와 중역 기자 중에서 누가 이긴 것일까? 조금 유치한 질문이지만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중역 기자라고 말이다. 물론 현장 기자들이 옹호했던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은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현재 탄핵을 당해 재판을 받고 있는 반면, 그의 선택적 과잉 수사에 삶이 무너질 뻔했던 인물들은 국민에게 인정 받고 있는 현시점을 고려하면 승부를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적이다. 당시로 돌아가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은 어떤 입장이 더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데 있다. 적어도 상대의 주장보다 더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는 입장은 이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내 의견이 상대의 주장을 이미 고려해서 도출된 논리라면 더 많은 진리를 담고 있으므로 선호할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이 방법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등장한다.


고대의 가장 위대한 웅변가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가 남긴 기록을 보면, 그는 법정에서 자기와 관련된 사안에 대한 것만큼이나(비록 더는 아닐지라도) 경쟁자의 입장을 늘 연구했다. 키케로가 법적인 공방에서 이기기 위해 행했던 방식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연구하는 모든 이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자기편 주장만을 아는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해 거의 모르는 셈이다. 그의 근거들이 훌륭해서, 아무도 그 근거를 반박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 역시 반대편 주장에 반박할 수 없다면, 그것들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어느 한쪽 의견을 선호할 근거가 없다. -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책세상, 79p. -


<젊은 기자들의 성찰을 바랍니다> 전문을 보면, 데스크는 이미 글의 형식에서부터 젊은 기자의 주장을 포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연히’, ‘중요한 것입니다.’와 같은 표현으로 상대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여 우선적으로 인정하고서, ‘다만’이나 ‘그러나’와 같은 단어로 본격적인 자기주장을 펼치는 문장 형식이 대표적이다. 아래는 이 글의 전문에서 이와 같은 구조가 잘 드러난 부분이다.


“물론 여러분이 말한 것처럼 현장 기자들이 추 장관의 무리한 징계 절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기사를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기사를 쓸 때 추 장관의 무리한 징계 절차가 더 큰 문제였는지, 아니면 윤석열 총장의 선택적인 수사나 선택적인 수사 기피가 더 큰 문제였는지는 따져봐야 합니다.”


“이용구 차관도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보도해야 합니다. 다만 그 취재 과정에서 이 차관의 이런 잘못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공개됐는지도 잘 살펴봐야 합니다.”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사건에 대해서도 비슷한 우려를 갖게 됩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범죄에 대해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수사해야 한다는 ‘절차적 정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실체적 정의’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역 기자들의 주장이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젊은 기자들이 한겨레의 불공정한 정파적 저널리즘을 비판할 때 근거로 사용했던 사례를 반박한 대목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데스크의 의견 중에서도 ‘중역 기자들의 공정성’이 젊은 기자들의 공정성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정성은 성역 없이 비판할 때보다 상대와 상황을 봐가면서 비판할 때, 즉 현실에서는 편향될 때 오히려 공정성이 온전히 발휘될 수 있다는 논리가 더욱 진리에 부합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앞서 다룬 YTN, 조선일보, 슈퍼맨(2025) 역시 어설픈 공정성이 불공정을 야기했고, 편향이 온전한 공정성을 만들 수 있었던 경우에 해당한다.


편향이 공정성을 만든다니. 글을 읽어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다. 그런데 대체 중역 기자들은 어떻게 이를 깨닫고 실천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거시적 안목’에 있다. 대부분의 언론이 추 장관의 무리한 징계 절차에 집중 또는 매몰되었을 때, 이들은 윤 총장의 선택적 수사도 저울에 올렸다. 더 큰 그림을 본 것이다. 이용구 차관 문제도,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사건도 마찬가지다. 개별 사안만 두고 평가하면 비판해야 마땅할 수 있어도, ‘맥락’이라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되면 무게 중심이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에 대해 ‘큰 진실’을 추구한다고 표현했다.


“개별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 기자로 일한다면 언제나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고 큰 진실을 고려하면서 취재하고 보도해야 합니다.”



공정성의 본질


언론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정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무한의 신뢰를 보낸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가치로서 공정성을 받아들인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공감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겨울의 추위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 ‘매화, 난, 국화, 대나무’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치우치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경직적이라는 인상을 받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웃기지 않는가? 통념적인 공정성은 그 자체로 극단적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공정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은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언론인들조차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천재성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 에디슨을 대표하는 문장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노력의 힘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99%의 노력은 누구나 다 한다. 다만, 남들은 없는 1%의 영감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의 통념과 거의 반대되는 의미였던 것이다. 공정성도 마찬가지이다. 공정성이라는 가치가 처음 널리 받아들여질 때에는 지금의 통념과 다른 의미로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이는 너무나도 중요한 가치이기에 다음 세대로, 그다음 세대로 계속 전승되었다. 모두가 아무런 논쟁 없이 그저 받아들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정성의 본질은 생기를 잃어버렸다. 피상적인 해석에 묻혀버린 것이다. 기계적 중립으로서의 공정성은 이렇게 굳어졌다. 이는 에디슨의 사례만큼이나 잘못된 통념이다.


사실 공정성의 본질은 ‘편향이 원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있다. 편향이 결과가 되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무언가 옳은 일을 실천한다면 어느 한쪽으로 조금이라도 치우칠 수밖에 없다. 결과의 편향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옳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편향이 원인이 되어버리면 진실을 가리게 된다. 예컨대 특정 정당을 지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언론은 진실에 다가서는 것보다 정당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을 꼬집는 가치가 공정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편향이 결과인 판단, 즉 편향된 선택이 오히려 공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음 편에서 ‘좋은 언론’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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