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세상이 규정되는 원리(5) 좋은 언론이란?
좋은 언론은 어떤 언론일까? 십중팔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공정한 언론, 객관적인 언론, 균형적인 언론. 이들은 ‘중립’이라는 공통의 가치를 가리킨다. 공정성, 객관성, 균형성은 엄밀히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만, 일반 대중은 보통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중립’ 아래에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중립이란 물리적 중간을 유지하고자 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중립을 저널리즘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안다. 보도는 시작부터 끝까지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일어난 수많은 사실들 중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안을 ‘선택’하여, 이들을 보도 직전의 수준으로 ‘가공’하는 저널리즘 과정 전체는 결코 온전한 사실을 보장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억지로 중립을 지키려다가 잘못된 결과에 도달한 경우를 꽤 봤다. YTN 기사의 ‘협치’와 조선일보의 형식적 균형은 오히려 민주주의 복구의 반대 방향으로 공론장을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슈퍼맨(2025)의 로이스 레인도 두 국가와 국제 무대에서의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는 고상함으로 수많은 희생을 초래할 뻔했다. 한겨레의 젊은 현장 기자들 또한 편향을 강박적으로 피하려다가 민주주의 훼손을 옹호한 셈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중립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중립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아직 설득이 안 되었다면, 당장 기사를 작성한다고 상상해 보자. 5:5로 진보와 보수의 시각을 나누어 담는 발상이 가장 중립적인 보도일 것이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다. 이 기사는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독자가 어떻게 생각을 하는 편이 옳은지, 그 생각이 어떤 선택과 행동으로 이어져야 바람직한지 전혀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이 없으므로 무책임하다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입장을 동일한 비중으로 기사를 편집한 행위만으로 민주주의 회복을 반대하는 결론에 도달했던 조선일보 기사를 떠올리면, 이것이 독자에게 온전히 동등한 시각을 제공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5:5 구성으로 사실이 왜곡되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5:5로 진보와 보수를 정확하게 나누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선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규정하는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이는 정도의 문제로,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절반의 구성은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 측면에서도 만족해야 한다. 이러한 정성 요소의 계산은 어떤 방식으로든 한계를 가지므로, 5:5 구성은 결함이 필연적이다. 사실 5:5로 내용을 구성하기 전, 선택의 저널리즘에서부터 기자의 주관은 이미 담겼다. 이처럼 가장 중립적인 기사를 구상해 봐도 이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할 수 있어도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따라서 중립은 허상에 불과하다.
다음 편에서 ‘좋은 언론이란?’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