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정치 비평과 레디메이드 미술

by 승현

이쯤 되면 독자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 거야?’


나는 앞서 북한을 주적이라 말하지 못하는 진보 진영 정치인도, 동시에 12월 3일의 계엄령을 옹호하는 이대남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좌의 극단도, 우의 극단도 이해하길 바랐던 것이다. 이런 정치 텍스트는 황당하리만큼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글들을 모두 따라온 독자라면, 이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가치관은 저마다 그렇게 형성된 사연이 존재하니까.


처음엔 혐오스러웠던 입장도 글을 읽고 나면 이해할 만했으니,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아, 완전히 잘못된 입장이란 없구나. 동시에 완전히 옳은 입장 또한 없구나.’


그리고 이 ‘모든 입장’에는 나의 입장도 포함된다. 따라서 나의 입장도 완전히 옳을 순 없다. 다른 이들의 주장처럼 나의 주장도 언제나 불완전하다. 이 역시 나한테는 완전히 옳아 보여도 누군가에게는 동의하기 어려운 의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전한 입장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입장은 불완전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본인과 생각이 다른 상대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겸손하게 된다. 바로 이걸 말하고자 했다. 좌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존중과 겸손에 대한 이야기. 존중과 겸손 이 두 단어에 도달하기 위해 두 극단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는,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논리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물론 이 주장 또한 누군가에게는 결코 와닿지 않을 불완전한 입장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상당히 보편적이고 설득력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곳에서 만족하며 멈춰선 안 된다. 우리는 이제 기존의 질서를 자유롭고 현란하게 뒤집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입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니까. 역설적이지만 모든 입장을 이해함으로써 말이다.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오직 논리만으로 순수한 세계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가장 자유롭다.


우리는 앞으로 ‘중립은 과연 바람직한가?’, ‘재판 결과는 무조건 옳은가?’, ‘뉴스는 사실을 보도하는가?’,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말일까?’ 등 이제껏 당연하게 받아들인 ‘상식’에 과감히 도전해 볼 것이다.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재정의해보자.



한편, 이처럼 모든 입장으로부터 해방되어 가장 자유로운 상태로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 보며 본질을 찾는 과정은 현대 미술의 레디메이드(ready-made, 기성품)와 닮아 있다.


우리는 이미 안다. 현대 미술은 현실에 대한 재현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후기 인상주의자 ‘폴 세잔(1839-1906)’에서 피카소의 입체주의로 이어지는 현대 미술 초반의 그 과정을 간략히 살펴봤었다. 이때 입체주의 외에도 절대주의, 미래주의, 광선주의, 원시주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등 다양한 현대 미술 사조가 쏟아져 나왔다.


(좌) 피트 몬드리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1930, 취리히 미술관 소장. (우) 르네 마그리트, <집합적 발명>, 1934.


이렇게 미술은 점점 더 현실과 멀어졌다. 이제 그림을 봐도 어떤 대상을 담아낸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쉽게 와닿지 않는다면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라. 아니면 현실과 멀어지다 못해 현실을 넘어버린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라. 그림을 대하던 기존의 방식, 즉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실감나게 그리면 그릴수록 훌륭하다고 평가하던 그 방식으로는 더 이상 현대 미술을 즐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림은 현실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되었으니까. 미술은 더 이상 현실이 모방된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 충만한 주체가 되었다. 그림은 이제 그림 그 자체로 온전히 존재했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MoMA 소장.


그러면서 문제 하나가 발생했다. 미술 작품과 기성품과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즉, 둘 다 온전하다는 데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의자도 의자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현대 미술 또한 과거의 작품들과는 달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표적으로 마르셀 뒤샹의 <샘>이 이를 꼬집으며 등장했다.


(좌) 마르셀 뒤샹, <샘>, 1917. (우) 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 1913.


그는 기성품인 소변기를 그저 뒤집어 놓고 예술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기성품과 현대 미술이 동일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에는 분명 동의하지만 어딘가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그것이 예술 작품이 아닐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작가가 의미를 부여하면 모든 사물은 그 순간 작품이 되는 것인가? 작품의 조건은 뭐지?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워야 하는가? 꼭 아름다워야 하나? 이는 이처럼 미술과 미학의 본질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피에로 만초니, <예술가의 똥>, 1961, 테이트 모던 소장.


이후 이러한 흐름은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라는 이름으로 초현실주의자 작가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나중에 가서는 이탈리아 작가 ‘피에로 만초니(1933-1963)’가 자신의 똥을 담아 만든 통조림을 금값에 판매하는 데 이르렀다. 이는 마우리치오 카텔란(1960-현재)이 2019년 접착 테이프로 벽에 바나나를 갖다 붙인 행위로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레디메이드는 가장 자유로운 미술 시대의 상징과도 같다. 지금까지도 뜨거운 이는 풍자마저 흡수해버리는 현대 미술의 무서운 기세 또한 상징한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현대 미술의 경계에, 그러니까 전위 중의 전위에 있는 미술 사조라고 생각한다. 미술이 자신의 경계를 넘으려 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질서를 도발하며 본질적인 물음을 분출시켰다.


이러한 모습이 어딘가 우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모든 입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우리도 마치 기성품 같은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 보며 본질에 다가가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도 레디메이드처럼 본질을 향해 도발적으로 나아가 보자.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