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언론은 중립적일 수 없다.

by 승현


“좋은 언론이란 무엇인가요?”


직접 이 질문에 대답해보자. 눈을 감고서 1분 동안만이라도.


아마도 다음과 비슷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언론이죠.”


언론의 중립성. 바로 그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중립성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다른 가치를 떠올렸더라도 언론에서 중립성이 얼마나 무거운 무게를 차지하고 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리 잡은 이 통념에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는가? 신기하게도 이 의문들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 미술가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바닥에 끌며 연주했다. 또한 머리를 붓처럼 사용하여 선을 그리기도 했다. 당연함에 의문을 던지는 그의 용감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보도는 중립적일 수 없다. 논리는 간단하다. 어떤 사건을 보도 직전의 상태로 만드는 전 과정에서 기자의 주관이 끊임없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보도를 하려면 우선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 중 보도할 가치가 있는 사건들 일부를 선택해야 한다. 신문 지면의 분량 또는 방송 시간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기자의 옆집 강아지가 어제 무지개 다리를 건넌 사건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보기엔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그 강아지를 아주 좋아했던 주인과 주변인들에게는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벌써 주관이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엥? 어디서? 옆집 강아지 사건으로는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국회의원의 발언이 기사감이 될 수 있을지 판단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어떤 기자는 그것이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기자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강아지 사건과 분명 다르다. 국회의원의 지위만으로 이미 보도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사실조차도 기자의 가치관에 따라 탈락하기도 하고 채택되기도 한다. 주관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이렇게 보도할 사실들을 선택했다면, 이제는 기사를 작성할 차례다. 이때 최대한 중립을 지키면 그나마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기사를 중립적으로 작성한다는 게 어떤 것일까? 양측의 글자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인가? 그렇다면 양측 사이에 존재하는 의견들은? 이들을 모두 샅샅이 찾아내어 동등한 글자수로 구성해야 하는가? 질적인 부분은 더욱 해결하기 어렵다. 단어가 가지고 있는 수위를 일일이 수치화해서 맞출 순 없지 않은가? 그 수치화의 기준은 또 신뢰할 만한가?


아니면 주관 없이 사실만을 기술하는 방법도 있지 않냐고 지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실도 사람에 따라서 너무나도 다르게 포착된다. 즉,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맥락, 시점, 인물 등 어떤 요소에 얼마나 주목하는지에 따라 아주 다른 기사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동일한 사건이라도 며칠 전의 맥락부터 소개하는 것과 사건 당일의 그 순간만 간략히 소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중립을 맞춘다는 말인가? 온전한 사실을 그대로 옮겨내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과연 바람직한가? 간단하게 형식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절반은 진보, 절반은 보수의 분량인 기사가 있다고 해보자. 그러나 이런 기사를 과연 좋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립은 상황에 따라 오히려 극단적으로 편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2025년 4월 2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이는 2024년 12월 3일의 계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앞두고 나온 기사로, 헌법학자 여섯 명의 의견을 빌려 해당 사건의 위헌성을 다루고 있다. 이 기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형식적인 대칭성이다. 중앙의 선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파란 배경에 탄핵 위헌론 헌법학자 셋, 오른쪽에는 빨간 배경에 탄핵 합헌론 헌법학자 셋. 그 아래로는 데칼코마니처럼 완전히 포개어질 만큼 계산적으로 구성된 레이아웃. 솜씨를 최대한 발휘하여 중립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아마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가장 중립적인 기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헌법학자들은 이 당시에도 계엄에 대해 주로 반대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계엄 다음날인 12월 4일부터 수많은 로스쿨 교수들은 계엄이 위헌일 뿐만 아니라 탄핵 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고, 12월 7일에는 131명의 헌법학자들이 시국선언을 했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의 비중을 동일하게 구성하는 방식으로 기사를 편집했다면, 오히려 사실을 왜곡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것처럼 보이게 한 셈이라는 것이다. 즉, 이상적일 정도로 중립을 지켰던 이 기사는 오히려 반민주주의적 시도에 찬성하는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중립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언론의 중립은 가능하지도, 항상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없다.’ 좋은 언론은 적어도 중립적이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기계적으로 중립을 지키려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편향된 언론 중에 좋은 언론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이 논리의 결론은 그렇게 된다.



하지만 어딘가 찝찝하다. 논리적으로는 납득이 되어도 완전히 받아들일 순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중립은 분명 중요한 가치를 품고 있고, 편향도 분명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이때 우리는 중립성에 큰 가치를 둬온 이유와 편향성을 경계해 온 이유를 마주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원인으로서의 편향과 결과로서의 편향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판단할 때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편향된 시각으로 온전치 못한 선택을 하는 경우를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훌륭하다. 그리고 최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고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만족스러운 선택을 내린다. 좋다.


이렇게 선택을 내리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레 편향된다. 선택을 했으니 중간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중간이 아니면 중립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쳤다면 편향되었다고 부른다. 이처럼 선택 과정에서 편향을 견제하는 태도는 좋은 것이다. 그리고 중립은 이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편향된 모습을 편향되었다고 비판한다면 우리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결과에서도 중립을 요구한다면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그렇다면 편향된 언론, 그러니까 사안을 중립적으로 검토한 끝에 어떤 입장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한 언론 중에서 좋은 언론이 있다. 문장을 이렇게 풀어보면 어떤가? 이런 의미에서 편향이라면 분명 괜찮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언론은 여전히 기사를 중립적으로 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중립적 태도는 사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만 필요할 뿐, 기사라는 결과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으니까. 좋은 기사도 표면적으로 편향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편향된 언론을 오히려 긍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럼 균형은 어디서 확보할 수 있는가?


크게 보면 된다. 언론사 하나, 기자 하나가 아니라 언론 지형 전체를 보면 된다. 우리는 이미 한 명의 기자가 혼자서 중립을 달성하려 하는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고 있다. 이보다는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 또는 저널리즘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어떤 입장에 도달하는 것이, 즉 편향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신기하게도 균형은 이 편향성과 양립할 수 있다. 이를 전제로 크게 보자. 각 주체들이 자신만의 저널리즘을 열심히 실천하다 보면, 이들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춰질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언론 생태계 전반적으로 균형을 확보할 수 있다.



이제 결론은 간단해졌다. 편향된 언론에 좋은 언론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언론 지형 전반적으로는 충분히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것.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기반으로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정규재의 팬엔마이크를 떠올려 보자. 이들은 각각 극좌와 극우로 평가받는다. 적극적으로 편향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 따르면 이들은 좋은 언론인의 조건을 만족한다. 과연 그러한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세간의 인식을 뒤로해두고서, 새로운 눈으로 이들의 진가를 직접 확인해보자.



1) 한겨레, <헌법학자들도 나섰다 “계엄은 위험… 탄핵소추로 돌발행동 막아야”>, 2024.12.07.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