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집에 놀러 갔다. 동네 친구들끼리 모이기로 했다. 엄마도 같이 갔다. 엄마들도 모이기로 했나 보다. 아니다. 엄마들이 모이기로 해서 우리가 만나는 것인가.
이모들과 엄마는 친했다. 물론 정말로 친했는지는 모른다. 자식이 학교에 잘 적응하려면 이런저런 정보를 들어야 했으니까 매번 친한 척 모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모들은 우리가 노는 한참 동안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동안 탁자 위에 놓인 음식도 계속 바뀌었다. 호화롭진 않았지만 대화를 하며 잠깐씩 씹어 넘기기엔 괜찮은 음식들이었다.
나는 그 수다를 좋아했다. 친구들과 놀면서도 가끔 엄마 옆에 가서 그 대화를 듣곤 했다. 그렇게 있다 보면 한 번씩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딸이야? 잘됐네~”
또는
“아들이 둘이야? 어떡해… 힘들겠다”
그러면 눈치 빠른 한 이모가 한 마디 얹었다.
“승현이는 그래도 여자애 같이 말썽 안 피우고 공부 잘하잖아~ 남자애 같지 않게 애교도 많고 말도 잘하고…”
우리 엄마 때문이었을까.
“아들내미 키우느라 고생했겠네~”라는 말은 이모들이 아니어도 엄마랑 손을 잡고 길을 걷다 보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만난 이웃들도 하나 같이 그랬다.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이. 특히 넉살 좋은 할머니들이 주로 그랬다. 그렇게 나는 존재만으로 부모를 힘들게 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들 비하는 잊을 만하면 다시 들려왔다. “키워봤자 늙은 부모 뒷바라지 하는 건 딸내미들인데… 쯧쯧” 일상적으로 폭력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딸로 태어났어야 했나.
초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툼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선생님은 남학생한테 먼저 사과하라고 하셨다. 누가 더 책임이 큰지 판단하는 일은 갈등을 매듭짓는 데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남자로 태어났고, 선생님이 그러라고 하셨으니까.
물론 선생님의 의도도 이해한다. 남학생이 여학생한테 먼저 사과하는 것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그리고 성별을 떠나 먼저 사과하는 것이 더욱 멋있고 아량 넓은 행동인 것은 맞다. 지금의 나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또한 남성이 여성을 배려하는 사회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지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강요받으면 어딘가 서럽다. 적어도 그 나이에는 분명 서럽다.
그리고 같은 잘못을 해도 남학생은 체벌을 받았고, 여학생은 명심보감을 베껴 써야 했다. 남학생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대해도 괜찮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생님들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여학생보다 남학생을 대하기가 더 편하지” 학기 초반에 교사의 권위를 보여줄 희생양도 남학생이 하면 되었고, 무거운 짐도 남자애들 시키면 됐다. 가슴 한 편이 답답했다.
사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여권이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여성은 결국 사과를 받아야 하는 객체이자 남학생이 철저히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선생님들은 과연 이런 여성상을 원했던 것인가? 분명 아닐 것이다. 따라서 여성을 너무 고려해도 안 되고, 너무 고려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적당히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20대 남성이 성장한 환경은 전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우리는 여성이 충분히 배려받았고, 오히려 남성이 상처받은 세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2016년 즈음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떠올랐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하게 된 계기를 2016년의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꼽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2016년을 우리나라 페미니즘 본격화 기점으로 삼아도 충분할 것이다.
이 강남역 살인사건의 범인은 당시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이 본인을 무시했다고 진술했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죄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여자라서 죽었다’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그러나 극단주의 페미니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을 열기만 하면 쏟아졌다. 인사이트나 위키트리를 비롯한 수많은 소식 계정들이 극단주의 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 글을 계속 퍼왔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모를 수가 없었다.
이처럼 여권이 충분히 보장된 사회에서 오히려 상처받고 자란 우리 남성들이 한 순간에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를 접한 우리들은 황당했다. 하지만 이것이 출발이었다.
이 페미니즘 물결은 우리 세대 여성들이 주도하며 점점 더 커졌다. 2017년에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였고, 여성 중심의 공약과 정책 소식이 쏟아졌다. 그리고 2018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페미니즘 시위인 ‘혜화역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홍대 몰카 유출사건에 편파 수사 의혹이 제기되면서 벌어졌고, 몰카와 딥페이크 문제에 대한 해결책 마련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세대 남성들은 페미니즘 운동의 다소 과격한 측면을 목격했다. 취지는 공감하나 구체적인 시위 내용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혜화역 시위에서는 ‘유좆무죄 무좆유죄’나 ‘난 네 6.9(한국 남성의 평균 성기 크기 비하) 좆의 딸깜이 아니야’라는 혐오 구호가 등장했다.
이런 사진들은 페이스북 피드를 조금만 내려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매일 매시각 수시로 휴대폰을 켤 때마다 이런 정보만 계속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온라인은 우리 세대의 오프라인을 구성했다.
남성으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우리 세대 남성이라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그 수많은 소식들 중에서도 우리 세대 남성이라면 모두가 기억하는 사건이 있다. 바로 군인을 모욕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던 위문 편지 사건이다. 이는 진명여자고등학교의 위문 편지 행사에 참여한 여고생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을 직접 읽어보자. 우리 세대의 남성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기성 세대가 생각하는 수준 그 이상으로 우리 세대에게 핵심적인 주제였다. 손 모양 하나로 기업이나 개인이 휘청거렸던 당시의 상황도 페미니즘이 우리 세대에서 얼마나 민감한 문제였는지 잘 보여준다. 국가 기관과 대기업에서 제공한 자료의 그림이나 광고에 극단주의 페미니즘 단체를 상징하는 손 모양이 보이기라도 하면 한 세대가 뒤집혔던 것이다.
이는 요즘도 여전하다. 얼마 전 2025년 9월 출시된 아이폰 17 에어 모델의 공식 광고를 잘 보자. 다른 나라들은 손으로 기기를 잡고 있지만, 우리나라만 손이 사라져 있다. 페미니즘에 예민한 대한민국 청년 세대의 인식을 반영한 결과인 것이다. 애플은 제품의 주요 소비층인 청년 세대를 세심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힘을 실어준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미웠을지 감히 상상이 되는가? 또한 민주당 정치인들은 20대 남성을 무식하고 옹졸한 집단으로 여겼다. 적어도 그런 뉘앙스가 발언의 기저에 깔려 있었다.
페미니즘은 기성 세대 남성 정치인들에게나 세련된 것이었다. 우리 세대 남성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억울했던 우리들을 달래주지도 못할 망정 그들은 상처에 소금이나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투 사건이 터지면서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성 관련 문제에 연루되었다. 우리 세대 남성들은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위선적이었다.
‘오히려 본인들한테 더 필요해 보이는 페미니즘을 왜 안 그래도 서러운 우리들에게 강요하는가?’
페미니즘은 사전에 알아야 할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성별이라는 준비물만 있으면 논쟁에 바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세대는 페미니즘으로 처음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대의 절반은 당연하게도 반민주당 정서를 가지게 되었다.
첫 인상은 정말 중요하다. 첫 인상이 좋으면 당분간 상대의 실수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갈 수 있지만, 첫 인상이 나쁘면 상대가 아무리 선행을 반복해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싫은 점만 계속 눈에 밟힐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당은 우리 세대 남성에게 찍혔다. 첫 인상이 최악이었다. 그러므로 꼭 젠더 분야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주제에서 이들이 지지하는 입장이라면 거부감부터 들게 된 것이다. 민주당이 하는 건 모두 잘못된 것일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민주당의 반대편에 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조국 사태는 민주당이 위선 정당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파렴치했다. 이에 더해 이재명 당시 대표는 더욱 엉망진창이었다. 온갖 범죄에 가담한 듯했다. 역시 그 당은 그 당이구나. ‘내로남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들 중 상당수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에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민주당 인사들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했고, 이들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고 했다. 민주당은 먼저 윤 정부의 인사들을 무분별하게 탄핵했고 예산을 말도 안 되게 삭감하여 국정을 마비시켰으니 행정부는 계엄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이다. 위선을 저지르면서 국정을 망치더니 꼴이 아주 좋았다.
또한 윤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탄생한 이재명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도 폐지하려 했고, 북한의 선전 매체인 노동신문을 우리 국민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처리했다. 또한 중국인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는 정책은 대체 무엇인가? 인스타그램만 봐도 중국인들이 서울 부동산을 점령하고 있고, 우리 혈세를 이용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고 한다. 이런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 경찰 창설 80주년을 맞아 바뀌는 제복 디자인도 중국 공안과 유사하게 바뀐다고 하던데. 정말로 국가를 팔아먹을 셈인가 보다. 윤석열 대통령이 옳았다. 우리는 계몽령을 계기로 반민주당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글을 읽다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꽤나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페미니즘 - 조국 사태 - 12.3 계엄으로 이어지는 이 사고 과정은 분명 합리적이지 않은 판단이 누적되는 양상이다. 아니다. 애초에 페미니즘부터도 뭔가 단추가 잘못 끼워지고 있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리 불쾌했어도 실질적인 피해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사소한 사건 하나하나에 이토록 크게 반응했다고..?’ 이 직관에 대해 천천히 살펴보자.
친구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해서 물어보면 대부분 문재인 정부 시기의 정책 실패가 치명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여성할당제, 여성 안심 귀가 서비스, 여성 우선 주차칸, 여성 전용 지하철칸 같은 정책을 예시로 든다.
하지만 여성할당제는 사실 시행된 적이 없다. 아마 당선 전 문재인 후보 시절 발언 중 여성청년 고용의무할당제에 대한 언급 때문에 이런 인식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인 설명도 없었을 뿐더러, 시행된 적도 없다. 가장 유사한 정책이라고 하면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가 있는데, 이는 문민정부 주도로 시행되어 왔고 성별에 상관없이 적용되므로 문재인 정부의 여성할당제와는 무관하다. 그나마 국무위원의 성별을 50%로 맞추겠다는 공약이 문재인 정부 시기의 여성할당제에 가장 부합했는데,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 안심 귀가 서비스는 2013년 인천에서부터 출발했고, 여성 우선 주차장은 2009년 오세훈 서울 시장 당시 시작된 정책이며, 여성 전용 지하철칸은 현재 부산에서만 운영 중이다. 여성 단체에서 문재인 정부의 여성 정책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시기에는 나 또한 중고등학생으로서 대학 입시 커뮤니티를 자주 이용했었다. 그곳에서도 페미니즘 정책 논란은 끊이질 않았는데, 여자대학교의 의대, 약대, 로스쿨이 역차별이 대표적이었다. 여대 입시는 남학생이 경쟁조차 할 수 없는 공간이므로 여학생이 남성보다 더 많은 TO를 가지게 된다는 논리였다. 좋다. 이런 부분은 공론화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이때 가라앉아 있던 수많은 남성 역차별 정책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경 체력 검정 논란도 이런 흐름에서 불거졌다. 이런 공론화 역시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것이 마치 문재인 정부의 정책인 것처럼 인식되는 현상도 동시에 발생했다. 이 부분은 분명 오해였다.
따라서 우리 세대 남성은 페미니즘 정책으로 인해 크게 손해봤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화가 이토록 단단히 났던 것일까? 단체로 헛것에 반응한 것인가? 이보다는 박탈감에서 분노가 기인했다고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이 박탈감은 인터넷 세대라는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워마드, 메갈리아, 갓건배, 베리나... 우리 세대가 아닌 분들 중에서는 이런 이름들을 아예 처음 들어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세대라면 이 단어들을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아마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 세대의 반응을 앞서 설명할 때에도 ‘무슨 이런 지엽적인 사건 하나하나에 크게 반응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는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 세대는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소비하고 소통한다는 것이다. 이 전혀 다른 수단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익명 커뮤니티, 유튜브 이렇게 세 가지로 대표된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인스타그램으로, 익명 커뮤니티는 디시 인사이드, 에브리타임, 블라인드 등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온라인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정보 전달 계정들은 기성 언론이 지키려고 노력하는 보도 윤리를 준수할 동기가 딱히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콘텐츠 내용이 비윤리적일수록 수익이 커지는 경향이 뚜렷하다. 비윤리적인, 즉 부정적이고 폭력적이며 자극적인 게시물이 대체로 조회수, 좋아요 수, 공유 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가 작동하므로 바람직하지 않거나 왜곡된 정보들은 빠르게 확산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느끼는 페미니즘 입장은 분명 큰 반응을 얻기 어렵다. 그러므로 극단주의 페미니즘 관련 콘텐츠가 수익에 유리하고, 이러한 소식으로 수많은 정보 계정들이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세대는 그저 폰을 켜서 평소처럼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이 경쟁의 산물을 자연스레 보게 된다. 그 자극적이고 왜곡된 정보로 점철된 피드를 내리며 정보를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 정보들은 정상적이고 검증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우리 세대 남성들이 당시 페미니즘에 격렬히 반응한 것도 이러한 이유가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분노하게 된 과정이 적절하든 적절치 않았든, 이는 어마어마한 박탈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역차별의 성장 환경에서 자란 지금의 20대 남성들은 극단적인 정보로 구성된 온라인에서 상처를 키워나간 것이다. 외부에서는 이를 두고 자꾸만 극우라고 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것이 극우라면 차라리 극우를 하겠다는 결심까지 눈에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페미니즘에 이토록 강하게 반응한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기성 세대는 이쯤에서 안타깝다는 감정까지 느낄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 세대가 기성 세대의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지금의 기성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가치관을 가졌을 것이라고. 반대로 기성 세대가 우리 세대의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지금의 우리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가치관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서로 너무 미워하지 말자. 우리는 각자의 사연에 따라 판단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