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살인마에게도 공감할 수 있어요?

by 승현

군대에 있을 때 후임이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형은 그럼 연쇄 살인마한테도 공감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아메리칸 사이코(2000)의 주인공을 예시로 들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여성들을 무차별적으로 강간하고 살해하는 인물이었다. 살해 방식도 다양했다. 창의적이었다. 아니, 엽기적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같은 인간을 죽이며 희열을 느끼는 ‘말종’에게도 공감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인간들을 한 데 모아 불을 지르든 무엇을 하든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이런 질문이 나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우리는 보다시피 영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 갑작스러운 질문은 아마도 나의 영화 취향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에게 영화 순위는 1등 괴물(2023), 2등 아가씨(2016), 3등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였다. 이 세 작품은 모두 사랑의 주변부를 다루어 사랑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래서 더욱 거북할지도 모른다. 나의 은밀한 영화 취향을 밝히자 그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그의 질문을 이해했다. 그런 사랑조차 품어낼 정도면 사이코에게도 공감할 수 있냐는 것이 질문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평소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을 믿을 뿐만 아니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나는 모든 소대원들, 나아가 같은 건물을 쓰던 다른 소대 인원들과도 이상할 정도로 두루 잘 지냈다. 완전 다른 성격의 사람들의 고민도 잘 들어주면서 친하게 지냈다. 이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도 크게 개의치 않고 잘 지내는 모습이 오버랩되었더라면,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었던 질문이 아니었을까.


답변은 간단했다. “연쇄 살인마에게도 물론 공감할 수는 있지.”


그 사람은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우리도 그렇게 태어났다면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 텐데 말이다. 나는 오히려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가 인권이라는 관념이 우리 인류에 자리 잡기 전에 태어났더라면, 충분히 즐거운 인생을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결국 현실을 살아야 하므로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공감과 현실은 다르니까. 이런 절충 지점에서 사형 제도에 대한 반대 근거가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며 지적 허영심을 한껏 뽐냈다.


아무리 그를 격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도 그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결국 무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면 대상을 인간에서 동물로 바꿔보자. 반려견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프로그램 <개와 늑대의 시간 2>에는 사이코패스 성향의 개가 출연한 회차가 있었다. 문제의 원인을 사이코패스 성향으로 진단한 훈련사 강형욱 씨는 개 주인에게 이를 솔직하게 설명해야 했지만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노화로 공격성을 낮추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하며 끝까지 사이코라는 표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강형욱 훈련사가 훈련을 사실상 포기하고 사과를 전한 경우는 해당 회차가 처음이었다.


주인도 단어 몇 개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지막 선택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만큼, 다른 개들처럼 당연히 우리 개도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테니까.


우리는 이들이 왜 이랬는지 안다. 사실 그저 아는 수준이 아니라 이들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담담하게 진행되었던 마지막 상담에서 눈물을 참기는 아주 어려웠다. 댓글 반응도 슬프다는 내용이 주를 이었다. 사이코패스 성향이라는 것은 그 개의 잘못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안락사를 당해야 하는 그 개의 운명에 연민할 뿐이다. 사이코패스 인간이라고 해서 다를 건 무엇인가. 마찬가지다.


이전의 글부터 지금까지 봤다면 작가가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진보와 보수, 나아가 극단주의 진보와 극단주의 보수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더니 이제는 연쇄 살인마까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 자기만의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 이렇게 사연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지만, 그 속에 몇 만 자의 글이 숨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함부로 단정 짓고 재단하려 해선 안 된다.


다만,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고려하며 최소한의 수준으로 현실과 타협할 필요는 있다. 연쇄 살인마는 아무래도 격리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격리의 이유이다. 우리는 그가 나빠서 격리하자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 생활을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격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엄밀한 기준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도저히 같이 살아갈 수 없는 수준이 아니라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연쇄 살인마도 이해할 수 있는 마당에 말이다.


옛말에 인간은 바꿔 쓰는 게 아니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쓴다는 표현이 과격하긴 하지만 인생을 조금이라도 진하게 살아봤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친구도, 연인도, 부부, 가족도 바꾸려 들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결혼할 사람에 대해 조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상대의 결점을 있는 그대로 감당할 수 있을 때 결혼을 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건 시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감당 가능한 결점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감당하기 버거운 결점이라면, 그것이 나의 설득에 잠시 바뀔지는 몰라도 같이 살다 보면 결국 돌아오고 말 테니까. 남을 바꾸려 드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