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소멸적 풍경‘을 만듭니다

전시 작품에 관하여

by floriestelle

다시 … 소멸적 풍경


어릴 적부터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던 나는 그림과 색을 표현의 도구로 삼았다. 손끝에서 형상이 나타날 때마다 희열을 느끼곤 했다.


언제부턴가 말라버린 풀들, 뿌리, 나뭇가지, 꽃,,,, 죽은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는지, 미적 시선이었는지 그것들을 모아 그림을 그렸더랬다.

그 작품들의 제목이 ‘소멸적 풍경’.

그림을 그만두고 집착과도 같았던 그것들을 떠나보낸 후,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꽃들, 잎사귀들, 기묘한 형태의 가지들이 이제는 붓을 대신해 표현의 도구가 되었다.

생기 있는 꽃의 모습에서도 시들어버릴 순간을 상상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린 지금, 나는 죽음을 예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어느 유명 인플루언서가 꽃집에 가서 “꽃이 시들어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꽃집 사장님께 했더니, 사장님은 “꽃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니 마음껏 즐기세요”라고 답했다 한다.


꽃이 언제부터 사람의 유희를 위한 존재였던가. 꽃은 애초에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꽃을 소유하고 싶게 만들었고, 그 결과 지나치게 재배되고 쉽게 버려지기에 이르렀다. (아마 그런 모습을 보며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리라…)

그럼에도 내가 꽃을 곁에 두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본디 자연에서 비롯된 존재이기에 인위적으로라도 자연을 곁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꽃 한 송이를 식탁 위에 올려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 한 송이가 집 안의 분위기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나는 꽃의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고, 그 끝 또한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런 이유로 시든 꽃에도 색을 입히고 감흥을 느끼고 싶었다.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스스로의 생식을 위한 과정이든, 인간의 욕망에 의해 소유된 과정이든, 그들이 태어나고 시드는 패턴 속에서 기억해야할것이 있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죽음 뒤에는 다시 생이 시작된다는 것,

생과 사의 반복은 어느 생명체에게나 동일하다는 것.


우리는 ‘스스로 아름답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에 대해 성찰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