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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Jan 04. 2021

#13. 여행과 일상 사이 어디쯤

 일년 전 오늘.

 베트남 나트랑에서 포레스트 뷰 룸에 앉아 하얀 레이스 커튼이 바람에 살랑 거리는 동영상을 올린 게 작년 오늘이라는 알람이 떴다. 그 날의 따끈한 공기, 시원한 바람, 바다 냄새, 보드라운 이불의 느낌이 한 순간에 몰려와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팔을 쓰담고 있다.

 무엇 때문이라고 꼬집어 낼 순 없지만 한 해 내내 힘들어 하던 남편을 위한 여행이었다. 계획에 없었고 기념일도 아닌 그야말로 그냥. 너무나도 당장 따뜻한 나라로 떠나고 싶어 며칠 후 출발로 질러놓고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이런 게 진짜 여행이지!

 사흘동안 우리는 리조트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알람없이 각자의 컨디션대로 눈을 뜨고 슬렁슬렁 조식을 먹고 돌아와 다시 늘어졌다. 남편과 아이는 책을 여러 권 챙겨갔다. 다 보지도 않을 거면서 짐을 무겁게 한다고 꿍얼거렸는데 모자람 없이 즐기더라. 침대에 엎드려 읽고, 야자수 아래 해먹에서 보고, 수영하다 나와 몸에 수건을 돌돌 말은 채 한 꼭지를 읽고 또 놀았다. 이 모습이 예뻐서 따라 다니며 사진을 찍어두는 게 내 일과였다.

 리조트에 식당은 세 곳이었는데 저녁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낮에는 특별히 정해진 식사 시간 없이 배고프면 즉석 밥에 김만 싸 먹어도 좋았다. 한국 마트에 주문하니 리조트로 배달해 주어 한국 과자와 간식거리를 쌓아두고 심심풀이로 씹어댔고 물놀이 후에는 컵라면을 꼭 먹었던 것 같다. 마지막 저녁은 연말 파티로 꾸며진 웨스턴 스타일 뷔페로 정했다. 담백한 쌀국수가 좋았던 레스토랑인데 그날의 스페셜 메뉴는 짜고 음악은 시끄럽게 느껴져 배만 채우고 일어섰던 기억이다. 아쉬운 밤이라 우리는 손을 잡고 별을 보며 조금 걸었다. 네 살 아들은 내일도 아침 먹으면 수영장에 갈 거랬다. 내일은 아침 먹고 우리 비행기 타러 가야해서 수영을 할 시간이 없어. 울음이 터지려는 걸 달래 아빠 목말을 태워 남은 길을 함께 걸었다.


 인스타그램 덕에 나트랑 반듯한 그 테라스 앞에 잠시 다녀왔네.

 원할 때 떠나 하루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것도 삼일을 충분히 보내본 게 언제였던가. 우리 넷 온 종일 붙어 지낸 것은 어쩐지 처음 같다. 남편은 출근하는 날 보다 일찍 일어나 조깅 하고 테라스 앞 마당에서 요가를 하고도 내가 일어날 때까지 책을 읽는다. 아침 시간을 귀하게 쓰는 사람이 출근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얼마나 지긋지긋 했을지. 쉰다하면 무조건 잠인 내가 다 이해 못하지만 저 남자는 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족들의 쉬는 모습을 쉬면서 지켜 보았다. 장난감을 쥐고 잠드는 작은 아이가 가장 알차게 놀고 제대로 쉬는 것인가. 햇살이 눈부시면 자리를 옮겨 책을 읽는 남편과 아이인가. 이 모든 순간을 사진에 담고 누워버리는 나는 어떤가. 함께 놀고 흩어져 쉼. 각자의 쉼을 지켜주는 우리가 기특했다.


 일상을 열심으로 살아내고 또 여행가서 늘어지게 쉬자. 이 약속이 당분간은 꿈도 못 꿀 일이 되어 버렸지만.


 '자동조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 지금을 되찾아야 해.'

 휴식도 책에서 배워야 했던 나다. 저녁 요리를 하면서 이따 회신할 업무 메일을 되새기는 나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남편이 추천해 줬었다. <최고의 휴식>에서는 하루 5분에서 10분 정도 명상으로 뇌를 쉬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이야기 한다. 나는 거기까지 실천하기는 어렵고, 순간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밥을 먹을 때 음식의 맛과 향기, 식감에 집중하여 충분히 느끼고 즐기기 같은 것들. 지금 있는 이 곳에서 느끼는 나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뇌를 자동조종에서 쉬게 하는 방법이다.

 나트랑에서 나는 쉼에 집중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가족들의 쉬는 모습에도 관심이 갔던 것이고. 뇌를 지금의 순간에 가만히 두는 게 여간 여러운 것이 아니었다. 자꾸 회사 메일을 열어보고 싶어 각성하여 휴식의 시간으로 끌어와야 했다. 결국은 눈을 감고 잠을 자는 것이 최선이었던 게다.


 일상을 제주로 옮겨온 지 꽉 찬 5개월이 되어간다. 아참, 여행을 온 게 아니지. 이제야 실감을 하고 있는 중이랄까. 처음부터 '쉬엄쉬엄' 살아보자 했지만 밥을 차려야하고 집을 쓸고 닦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쉬엄쉬엄'이란 말인가. 베란다 창으로 한라산이 보이고 초록초록 낮은 밭을 바라보는 게 힐링이긴 하다. 그렇다고 외출을 다녀오면 메이드가 방을 정리해주길 하나, 좋은 날 로비층 식당에서 라이브 음악을 연주해주길 하나.

 여행자처럼 맛집을 찾아다니다간 가정경제가 구멍이 날테다. 쓱하면 원하는 시간에 식재료를 배달받아 먹던 습관을 버린 것도 이제야 조금 받아들였다. 우리집은 배송불가지역이기 때문. 제주 내 빠른 배송도 분명 있을 것이라 믿고 헤매다 포기하는 데 5개월이 걸렸다. 이제는 제철 식재료들을 직접 골라 장바구니에 담고 쉬운 레시피를 찾아 요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걸려도 아이들이 잘 먹으면 세상 뿌듯하다. 이런 재미를 결혼 10년 차에 깨달은 것이 부끄럽긴 해도 내가 기특한 걸 어쩌나. 늘 먼저 떠올렸던 돈가스, 볶음밥, 미역국, 콩나물국 같은 계절 없는 메뉴는 비상으로 미뤄두고 오늘도 낮부터 새로운 제철 레시피를 검색하고 있다.

 제주산 야채들은 맛이 참 좋다. 원래 제철 채소들은 다 맛있는 걸 이제야 안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리에 공을 들이니 주방살림이 아쉽다. 굴밥은 속이 깊은 사기그릇에 담으면 좋겠는데 제주집에는 밥그릇, 국그릇 뿐이다. 살림에 애착이 없던 엉터리 주부라 상관없다 생각했던 부분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조리도구도 사실 내 손에는 너무 크고 불편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다 새로 살 수도 없으니 그저 참아낼 수 밖에. 믹서기, 작은 국자, 나무 수저와 젓가락. 서울집에 가면 가져오려고 쓴 메모가 한 줄 한 줄 는다.

 청소기도 내가 쓰던 것이 나에게는 더 익숙하고, 청소솔이며 수건도 싹 바꾸고 싶어 근질근질 미칠 노릇이다.


 풀옵션 리조트 여행은 끝났다. 여기에서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내 살림을 가져오던지, 남의 살림에 익숙해 지던지. 평화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나트랑에서 휴식을 연습한 것 처럼 나는 지금 제주에서 바람직한 일상을 공부하는 기분이다. 공간을 가꾸고 물건에 정을 주어 일상을 평화롭게 이어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순간에 집중하는 것은 꼭 휴식에만 들어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하는 순간을 즐겨 보겠다. 아이들이 등교준비하는 표정을 살피고 일할 때는 일만 하기로 한다. 그리고 소중한 내 커피 식기 전에 온전히 느끼고야 만다.

 

 제주는 프리랜서 엄마가 일과 삶 그리고 휴식의 밸런스를 맞추어 살아가기에 맞춤이다. 이제는 '워라밸(Work-life banlance)'이 아니라 '워라블(Work-life blending)' 시대라 했던가. 살림이 재미없던 나는 요리하고 청소하는 시간을 아깝게 생각한 적이 있다. 미뤄둔 살림 때문에 결국 일에 집중이 안되고 아이들에게도 소홀했던 시간이 있던 것을 보면 중요한 일과인 것을. 어차피 일과 삶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면 조화롭게 블랜딩해 보자. 잘 안되는 날은 시원하게 파도치는 바다 앞에 서서 리셋하고 내일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일상이 무너진 요즘, 제주에서 비교적 안정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여행인지 일상인지 헷갈리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갔을 때 큰 위로가 되길 바란다. 복잡한 문제를 마주하고도 지치지 않는 여유와 힘을 기르는 시간이길. 특히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나트랑에서 휴식을 관찰하던 마음으로 조바심은 빼야한다고 다짐해 본다.


 나는 지금 여행과 일상 사이 어디쯤인가.

 무엇이라고 정하지 않아도 좋지 아니한가.

 나는 여행하듯 일상을 이어갈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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