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때그대 Dec 20. 2020

#12. 눈을 눈으로만 보다가

 크레마가 알맞게 덮힌 진한 커피를 두툼한 잔에 내리고 손으로 감싸 온기를 먼저 마시는 중. 살짝 서리가 낀 창 밖에는 펑펑 눈이 내리고 있다. 우리집 창 아니고 손바닥만한 내 핸드폰 창으로 보는 첫 눈 감상이다.

 인스타그램에 하루 종일 올라오는 친구들 시선의 눈 사진에 아주 빠져들어 종일 보고 또 보았다. 동이 트는 아침에 아무도 밟지않은 눈 길을 걷는 발 사진에 내 발을 얹어 함께 걸었고, 앞 동 사이로 이만큼  가려진 눈 내리는 하늘은 서울집 뷰 같아서 반가웠다. 동생네 눈사람 형제는 어쩜 자기들 성격대로인지 누가 눈사람 제작자인가 나는 한 눈에 알겠다.

 내가 그 곳에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인스타그램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말이다. 친구가 담아내는 시선이 내가 되어 바라본다. 나의 인친은 거의 가까운 지인들이라 단체톡을 하는 기분 마저 든다. 피드를 보고 있으면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고 상차림 사진에서는 음식 냄새도 난다. 정리가 잘 된 부엌 사진 앵글 뒤는 먹다 남긴 과자봉지와 갈색 무릎 담요가 구겨져 있는 것도 나는 안다.

 앞 뒤를 다 아는 우리는 어쩌면 문자 대신 사진과 글을 올리고 아까 올린 피드 이야기를 수다로 자세히 풀어내는 통화를 한다. 눈 덕분에 또 우리 서로 하루를 공유했다.


 오늘 제주에도 눈이 내렸다. 싸락눈이다. 촤라라라락. 그야말로 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집 앞 배추밭에 눈이 떨어지는데 배춧잎에 눈 싸라기가 통통 튀었다. 아쉽다. 쌓이지는 않겠구만. 구름이 낮게 깔려 한라산은 아예 등어리도 안 보인다.

 1100고지에 가면 진짜 눈 덮힌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라산 CCTV를 확인해 보았다. (제주는 변덕스러운 기상상황을 고려해 주요 도로와 관광지를 실시간 CCTV로 확인할 수 있다.) 1100고지 휴게소를 비추는 화면은 도로가 제설되지 않은 상태였다. 버스가 느리게 멈추었다가 두 명을 태우고 떠난다. 소형차 진입이 통제되고 있나보다.


 딸아이는 하교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코가 빨개져서 집에 돌아왔다. 눈은 쌓이지도 않았는데 괜히 신이 나서 뛰어 놀았단다. 뭐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뛰고 도망치고 잡고 소리지르는 게 재미있었다고.

 다시 한번 1100고지 CCTV를 확인했다. 도로는 제설이 되어 승용차들이 주차를 가득 했다. 아이들에게 겨울왕국을 보여주겠다고 꾀어 한라산 언저리까지만 가 보기로 한다. 체인없는 차량은 1100도로 통행이 금지이고 있다한들 나는 눈 길을 굽이굽이 올라갈 자신이 없다.

 목적지로 찍은 곳은 어승생한울누리공원. 큰 도로에서 한라산 쪽으로 길 따라 조금 오르다 목적지에 닿기 전에 차를 세웠다. 어차피 방향만 정하느라 찍어둔 포인트였다. 빙 둘러보는 모든 시선이 온통 하얗다. 여태 나는 스키장 정상에서 보는 설경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았다. 처음이다. 이건 뭐랄까. 추운데 포근한 느낌이 드는 신기한 풍경. 한 걸음 두 걸음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아본다. 발이 푹 빠져 발목이 차갑다. 뒤 따라 아이들이 퐁퐁 뛰다가 신발이 젖는다고 난리가 났다. 부츠없이 오자고 한 엄마 잘못이 되어 금새 차에 올랐다.


 깍뚝 썰은 소고기를 참기름에 볶고 겨울무를 나박나박 얇게 썰어 함께 볶다가 뭉근하게 끓인다. 다진 마늘, 소금 조금, 국간장으로 간을 해도 맑은 국물에서 달큰한 맛이 난다. 내가 딸 아이처럼 눈 오는 겨울에 코가 빨개지도록 놀다 들어오면 엄마가 저녁상에 내어주시던 소고기무국. 서걱서걱 무 써는 소리를 듣고 나는 주방에 쪼르르 달려가 한 조각 집어 먹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두툼하고 길게 무 한덩이를 썰어 내 손에 쥐어 주고 조금만 기다려 하고 보냈었지. 아까 딸이 빨간 코를 하고 들어올 때 부터 소고기무국을 메뉴로 정해 두었다.

 엄마 밥상을 엄마처럼 뚝딱 차렸다.

 뱃고래가 작은 딸이 뜨끈한 국을 후루룩 마시고 밥을 말아 두 그릇을 먹었다. 겨울에 엄마가 끓여주던 소고기무국이 참 맛있었다고 기억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다음 눈 오는 날에 또 소고기무국을 끓일 생각이다.


 눈 오는 날은 소고기무국.

 이야기가 엉뚱하게 흘렀지만 오늘 하루 따뜻했다는 뜻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1. 그 선택, 확실합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