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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Jul 14. 2021

#23. 제주하늘은 원래 아름답다

 '원래 그렇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겁하고 무기력한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원래라는 말의 의미는 그것의 처음, 근본부터 그랬다는 것인데 그 시작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것이 처음이라는 확신도 없다. 아이들을 바라볼 때,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쓰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애쓰는 단어.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원래 이래. 사람 뒤에 원래가 붙으면 너무 매정하다. 본래 이렇게 태어났으므로 달라지는 모습을 기대하지 말라고 잘라버리는 느낌이 든다. 누가 자기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하면 요즘 말로 손절각. 알러지가 목구멍에 돋은 것 처럼 말문이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오늘 딱 그런 일이 있었다.


 경상도 출신이라 원래 말이 거칠어요.

 분명히 나를 겁주거나 기를 꺾고 싶은 의도가 있는 대화였다. 삼초 동안 조용히 멘탈을 잡고 그가 오해하는 부분에 조목조목 답을 했다. 이어서 방금의 말씀은 기분이 나쁘다 했더니 경상도 남자라 원래 그렇다는 거다. 그는 경상도 사람들을 욕 보이고 비겁하게 숨어버렸다. 미안하다고 했지만 무례함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본인이 경상도 사람인 것이 미안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것은 미안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사과를 받지 못한 셈이다.

 원래 그런 사람은 없다. 특유의 사투리 억양은 말끝에 묻어 나올 수 있지만 어감의 미묘한 차이는 근본에서 온다. 그는 그의 말대로 원래, 말이 아니라 본성이 거친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내 남편이 경상도 남자인데 내가 그걸 모를까.


 하필 저녁 준비 시간에 속이 시끄러운 전화를 받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카레라이스 하려고 꺼내둔 당근, 양파, 소고기를 쪼사(잘게 자른다는 경상도 말) 모조리 볶아버렸다. 아이들은 오늘 저녁 메뉴가 '원래' 볶음밥이었던 걸로 안다.


 제주에서 학교를 다닌지 한 달 반만에 큰 아이는 제주에 살고 싶어졌다고 했다. 완전히 사는 것이 안되면 가능한 오래 살고 싶다고 말이다. 자기가 만난 제주사람들은 다 잘 웃고 긍정적이더라며 나도 제주 살면 그렇게 될 것 같다는 게 이유다. 우리가 만난 제주사람은 기껏해야 학교 선생님 아니면 단골식당 사장님이 전부라는 점에서 살짝 웃긴데.  

 사람이 환경을 닮고 또 그 사람이 누군게에게 영향을 주는 마법같은 비밀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섬세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 둥글게 키우느라 힘이 들었던 아이다. 신발에 들어간 작은 돌멩이처럼  마음에 거슬리는 게 있을 때 마다 아이 자신이 더 힘들었겠지. 쉽게 긴장하고 불안한 생각이 빠르게 커져 편안한 웃음이 잘 안나오던 아이가 제주 사람들의 웃음을 닮고 싶다니.

 제주에 오면 달라질 아이의 모습을 내심 기대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빨리일 줄도 몰랐다. 아이는 즐거운 학교생활을 한지    만에 제주를 닮고 싶다 말하고 있다.


 아이가 미술을 좋아하면 미술학원, 수학이 부족하면 수학학원. 잘하는 것도 모자란 것도 학원을 먼저 떠올리는 엄마였다. 학원을 안보내도 어디가 좋다더라는 정보는 알고 있어야 엄마다운 것 같았다.  아이가 원래 어떤 기질인지가 그토록 궁금했고 숙제였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고 또 그 틀 안에 갖혀 치우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더 문제였다. 실은 아이의 성격적 기질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을 궁금해하는 내가 몹시 속물같고 징그럽다.

 모래로 밥을 짓고 꽃 잎으로 수를 세던 나의 어린 시절을 잊고 있었던 거다. 유치하고 아름다운 그 시간이 어른인 나에게 솜이불이 되어준다는 것을 아이의 하루에 비추어 새삼 떠올랐다. 아직 여름은 채 오지도 않았는데 새까맣게 타서 눈이랑 이만 하얗게 반짝이는 아이의 웃음이 찐 행복이다. 매일 노는 게 하나도 걱정이 안된다.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고 힘들 때 주저앉아 쉬어가기 좋은 색동 솜이불을 두껍고 넓게 만들어 깔아두는 시간이라 생각하지 뭐.


 제주를 닮아야 하는 사람은 어쩌면 아이가 아니라 나인지 모르겠다. 듣기 싫은 말 한마디에 화라락 타오른 나도 제주 하늘처럼 유연한 마음 근력을 가질 수 있을까. 원래 그렇다고 믿는 것들을 흔들어 새로운 색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가 바라보는 무엇도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의심하지 않는 고요한 마음.

 하늘은 원래 하늘색이 아니고 매일 새롭게 아름다운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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