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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Jun 30. 2021

#22. 숲으로 가자.

 생일 선물로 트레킹화를 받았다. 내가 사달라고 해놓고 막상 박스를 여는데 기대감이 없고 실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등산화 치고는 모양이 둔하지 않고 컬러도 알록달록 하지 않아 마음에 든다. 동그란 것을 또르르 돌리면 신발끈이 조이고 살짝 위로 당기면 풀리는 것이 신기했다. 덕분에 멋지다고 소리를 질러 헛헛한 웃음을 감출 수 있었다.

 내가 트레킹화를 갖고 싶어하다니. 스스로 웃긴거다. 산이라면 질색인데 말이다. 남편이 물어보기 전부터 혼자 뭐를 사달라고 할까 고민했었다. 단박에 떠오른  트레킹화였는데 정말 이것 뿐인지, 그래도 생일이니까 조금  귀하거나 정다운 물건은 없는지가 고민이었다.

 좋은 가방은 두었다 어디 쓰나. 있는 것도 안쓰고 있지않나. 제주에서는 넉넉한 사이즈의 에코백이 최고다. 물통, 책, 장난감, 휴지, 여벌옷과 간식이 담기고 요리조리 굴러다녀도 문제없는 에코백. 이것도 이미 세 개나 있다. 뽐내어 다닐 곳도 없으니 편하게 입고 쉽게 빨 수 있는 옷이 좋다. 일하러 가는 것도 한 달에 한 두번인데 멋스런 옷을 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다. 블루투스 이어폰은 나를 위한 선물로 이미 가졌고 작고 반짝이는 것들은 더더욱 필요가 없다. 화장품도 향수도 갖고 싶지가 않다. 신기하게.

 그러면서도 필요한 게 없다고 말하는 건 또 싫어서 생일 며칠 전까지 고민을 끌어오다 이야기 한 게 트레킹화였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서 어떤 물건이 갖고 싶은  없는데  자꾸 뭐가 갖고 싶냐고 물어보느냐며 곤란해했었다. 내가 아니고 제주에서 처음 맞는 생일 무렵 딸아이의 말이다. 어떻게 그런 마음이  수가 있지? 나도 지금 행복하지만 갖고 싶은    넘게 말할  있는데. 아이의 풍요로운 마음이 부러웠다. 내 자식한테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더라.

  달이 지나 나도 제주에서 생일을 맞이했다. 아이의 마음만큼은 아닐지라도  역시 어떤 값진 물건이 갖고 싶지 않을 만큼 적당히 행복하다. 적당히 충분하다. 전혀 갖고 싶은 것이 없고 완벽히 충분한 것은 아니어도 없으면 없는대로  좋다. 이보다 욕심을 내면  받을  같은 어쩐지 종교적인 마음도 생긴다.


 남편은 주말 계획에 어김없이 숲을 넣는다. 새 신을 선물 했으니 더욱 흥이 나는 모양이다. 아이들은 아빠가 오름가자 하면 인상을 구기고 반대의견을 쏟아낸다. 오일 동안 유치원과 학교 가느라 피곤했으니 집에서 쉬고 싶다는게 아이들 생각이고 서울집에서 혼자 외로웠으니 당신 가자는 대로 따르길 바라는 게 아빠 마음이다. 아이들의 궁시렁에 남편은 기분이 상하고 만다.

 토라진 남편과 투덜대는 아이들을 달래어 숲으로 간다. 남편을 아이들과 같은 급으로 묶은 게 서운할지 몰라도 주말마다 투닥거리는 게 내 눈엔 비슷해보이는 걸 어쩌나.

 그나저나 왜 내 생각은 아무도 안 궁금해 하는건지.


 새 트레킹화를 신고 왕이메오름을 걸었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도로 가장자리에 얌전히 차를 세우고 길게 자란 풀 숲을 열었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여서 토토로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흙바닥을 꾹꾹 밟으며 새 신발의 흔들리지않는 걸음에 만족하는 순간. 삼나무 숲길이 짠하고 나타났다. 우리 가족 모두 우와 소리를 질렀다. 키 큰 삼나무가 만들어 낸 진한 숲 냄새, 새소리, 붉은 흙 길 위에 우리만 있다. 비밀의 숲이다.

 숲을 열고 꾸부정하게 걸어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터덜대던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폴짝폴짝 뛰어도 절대 닿지않는 삼나무 지붕. 삼나무를 주인공으로 화면 가득 키를 맞춰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은 아주 작고 그마저도 뒷모습이지만 통통 튀는 발과 발랄한 팔이 신났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막상 나오면 너희가 제일 신날 거면서.


 트레킹화가 마음에 든다. 선물로 트레킹화를 결정한 나도 마음에 든다. 안하던 짓 해보고 싶게 하는 제주가 마음에 꽉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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