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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때그대 Jun 16. 2021

#21. 쉬는 중입니다. 숨.

 서울로 출장을 다녀온 날은 제주에 살 집이 있다는 게 어떤 부심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그랬다.


 도착층 2번 게이트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 나는 그 줄을 끊고 죄송하다는 의미로 살짝 목례를 한다. 나는 택시를 탈 필요가 없는 사람, 내 차는 저 앞 주차장에 있다는 것을 어필하듯 성큼성큼 간다. 오른쪽으로 가면 렌트카 회사들의 셔틀버스를 타는 곳이고 나는 주차타워가 있는 왼쪽으로 몸을 튼다. 이러는 내가 우스워서 마스크 안에서 스스로를 향한 썩소를 지었다.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는 것도 처음엔 매우 뿌듯한 일이었다. 길이 아주 쉽다는 이유와는 별개로 내가 제주사람 다 되었네 싶었다는 말이다.


 잘 모르는 길도 좀 헤매면 어떤가. 이정표에 적힌 마을 이름으로 대략 방향을 가늠하고 달리다보면 목적지 근방에 닿는다. 제주를 시계라고 생각하고 몇 시 방향에 있는 마을인지 이제 제법 알고있다. 모르는 길을 가면서도 불안보다 궁금함이 생긴다. 헤매다 만난 길 위에서 숨어있는 떡볶이집도 알아두고 빈 집인 것 같은 구옥을 수리해 살아보는 상상도 해 본다.

 앞 뒤에 차가 많지 않아 내가 빨리 방향을 정해 다른 차에 내 진로를 알려야 할 부담이 없고 아이들 하교시간만 아니면 빨리갈 이유도 없다.


 제주살이 부심은 이런 여유에서 온다.

 재촉하지 않는 공기. 느린 듯 보여도 제 할 일은 모두 열심을 다하는 기운. 공기 속에 살아있는 에너지가 녹아있다.

 살랑하던 봄 바람이 후끈해지면 나무잎 색깔이 진초록으로 변하고 풍성하게 자란다. 이름은 몰라도 아무튼 고운 꽃이 피고 나비와 벌이 바쁘게 나는 계절이 왔다. 곧 열매를 맺겠지.

 우리집 주차장에는 작년에 왔던 제비들이 또 다시 찾아와 둥지를 만들고 있다. 내가 쳐다보면 경계를 하고 하던 일을 멈추어 버려서 몰래 숨어서 지켜본다. 얼마나 부지런히 열심을 다하는지 모른다. 올 해도 여기서 새끼들 잘 키워가라.

 집 정원이라 여기고 사는 연화못에는 연꽃봉우리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왜가리가 왝왝하고 날아와 쉬었다 간다. 밤에는 맹꽁이가 쉬지도 않고 운다.

 계절은 이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때에 맞추어 제 할 일을 한다. 때로는 거칠게 뜨겁게 또 차갑게 바뀌는 공기는 계절을 부르는 제 할 일일 뿐이고 혼란한 기운을 뒤집어 다시 제다리로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나무가 자라고 꽃을 피우는 공기, 제비부부가 둥지를 짓느라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하늘, 왜가리가 쉬어가는 연못. 저 안에 나도 있다. 나도 같은 공기로 숨을 쉰다.

 숲과 나무, 동물과 식물을 키우는 공기를 나도 매일 마시며 산다. 살아있는 에너지 안에서 자연스럽게 할 일을 하는 삶. 조금 느려도 괜찮은 것 같은 위로. 다른 누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는 자존. 자연의 일을 방해하지 않고 내 속도를 찾는 여유.

 

 이 공기 실컷 마시고 나도 자연스럽게 살아갈 것이다. 눈부시게 튀지 않아도 좋다. 삐걱거리는 일상이 스트레스가 되어도 금새 회복하는 방법을 제주에서 익히는 중이다. 언제 도시로 돌아갈지 모르지만 잘 배워두었다가 나는 그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즐겁게 열심으로 해나가면 된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숨을 깊게 들이 쉬고 천천히 내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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