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아니야?"
중1 아이와 식탁에 마주 앉아있다. 아이는 중간고사 공부 중이고 나는 이 글을 쓴다. 이제 중1인 아이는 2주 후에 인생 처음으로 시험을 본다. 초등 6년의 시험은 평가지표가 아니니 그저 잘 놀았고, 중학교 1학년 1학기는 자유학기라 시험없이 진로탐색활동을 하며 계속 잘 놀았다. 나름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가고 있지만,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시험 자체가 처음이다. 객관적인 위치를 모르니 아이가 몹시 불안한가보다. 그 마음을 들어주느라 나는 기가 빨릴 지경이다.
대학입시(대학을 갈지 안 갈지 모르겠지만)까지 10번의 정규고사가 있을테고 그 중 첫번째 시험인데 이 난리면 어쩌란 말이니.
"망칠 것 같아."
"괜찮아. 차라리 망쳐."
"무슨 말이야?"
"첫 시험에 망치면 앞으로는 나아질 거 잖아. 우연히 잘 보는 것 보다는 나아."
"우연히? 내가 열심히 안 한다는 뜻이야?"
"열심히 하지. 내가 알지. 너가 알고. 하지만 시험이 처음이잖아. 마지막 시험이 아니잖아. 어떨지 모른다는 뜻이야. 모르니까 다 괜찮다고."
그래도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천하태평하면 더 속이 터질 것 같긴 하다.
내가 그랬다. 천하태평. 정확히는 천하태평인 척을 했다. 특히, 아빠에게는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내가 공부를 좀 하는 것 같으면, 다음 시험은 기대가 되는구나. 생각하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부터다. 그래서 몰래 공부했다.
남들은 부모님이 외출하신 동안 티비를 보다가,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티비를 끄고 방으로 들어간다던데 나는 반대였다.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부모님이 오시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티비를 보았다. 하루종일 그러고 있었던 것 처럼. 아빠랑 같이 뉴스를 보는 동안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너 시험기간 아니니?"
"시험기간 맞아. 공부는 평소에 하는거지."
발을 까딱 거리는 것은 내 불안의 표시인데 여유부리는 척 하면서 말했다. 쓸데없이 왜 그랬을까. 그냥 들어가서 공부하면 될 것을. 다행히 아빠는 일찍 주무셨다. 뉴스가 끝나면 주무신다. 이제 공부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드라마까지 이어 볼 것 처럼 내내 소파에 있다가 아빠가 잠 드셨다 싶으면 그제서야 공부를 다시 했다. 그러다 아빠가 새벽에 물 드시러 나오는 기척이 들리면 재빨리 스탠드 불을 끄고 숨을 죽였다. 나야. 정말 왜 그렇게 까지 했니.
"너 천재 아니야?"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통 보지 못한 아빠는 내 성적을 보면 꼭 천재라고 말했다. 공부를 안 하던데 이 정도라면 열심히 공부해 봐라, 대단할 것 같으니. 라는 말과 함께. 분명 잘 했다고 칭찬을 먼저 하셨을텐데, 그리고 천재라는 표현도 칭찬을 다른 말로 하신걸텐데 그때의 나는 아빠의 부담스런 기대로만 들렸다.
제발. 그 놈의 천재. 그 소리 듣기 싫어 시험을 못 볼 수도 없고 나로써는 매번 난감했다.
천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주를 가진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어떤 사전에는 '특히, 어린 아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선천적이 아니더라도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나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도 천재라고 한다.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않았고, 남보다 뛰어나지도 않고, 어린 아이도 아니다. 내가 몰래 공부하느라 얼마나 시간이 부족하고 새벽마다 쫄리는지 아빠가 안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아빠니까 기대 좀 할 수 있지, 그런다고 굳이 몰래 공부할 필요가 있었나...나 자신도 참 어이없다.
학부모가 되고서야 비로소 아빠와 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느 날 부터는 내가 도둑 공부를 하는 것을 아셨다고 하더라. 이유를 물으면 삐딱하게 굴 것 같고, 그냥 방해하고 싶지않아서 모른 척 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문제의 '천재' 발언은 '충청도식 조크'였다고 한다. 헐. 충격적. 맞다. 아빠는 충청도 사람이다.
아빠의 말투를 살려 다시 따옴표를 붙여본다.
"어메~ 참말로. 우리 딸 천재 아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