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안 된다고 할 거잖아."
아이는 인생 첫 중간고사를 봤다. 요즘 중학교 1학년은 자율학기제라고 해서, 1학기는 정기고사를 보지 않고 진로탐색을 한다. 진로라는 것이 1학기에 20여회 정도의 특강으로 찾아지는 것인가 의문이 들지만 나는 공교육을 신뢰한다(?). 아이에게는 진로탐색이 혼란스웠을지라도 시험이 없다는 것은 기쁨이었다.
그래서 2학기 중간고사가 처음 경험해보는 정기고사다. (초등학교에서도 과목별 수행평가는 있었으나 점수를 내고 순위를 매기는 식의 시험은 없었다.) 3주 전부터 대비를 시작했다. 아이는 중간고사를 보는 다섯 과목의 계획을 세웠다. 꽤나 진지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 만으로,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첫 시험이니 점수는 연연하지 말고 계획한 만큼 공부해 보는 연습을 하는 것에 의미를 두자고, 아이와 함께 다독였다.
여태 사교육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다. 집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예습과 복습 정도로 학교가 제시하는 기준을 훌륭히 수행해왔다. 중학교라고 다르겠냐만은 불안이 문제였다. 첫 시험 결과는 중요하지않다고 했지만 아이가 기 죽을까 나는 걱정이 되었다. 아이는 학원을 다닌 적이 없으니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알지 못해 불안해 했다. 결국 수학 과목은 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학원에서 실력을 높이는 것은 둘째고 우선 우리 모녀에게는 문제풀이로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없어 좋았다. 나는 아이의 공부를 응원만 하면 되어서 진심으로 좋았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아이는 우산없이 학원에 갔다.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학원 앞에 서 있었다. 그 사이 비는 그쳤지만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로비에서 나를 발견하고 총총 달려나오는 딸의 기분이 좋아보였다.
"배 고프지? 간식 좀 사갈까?"
"괜찮아. 이거 마셔서 별로 배 안 고파."
말차라떼에 푹 빠진 아이가 학원에 가져가고 싶다고 해서 텀블러 담아 보냈었다. 시험공부란 것을 성실히 하는 아이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중이다.
평소라면 집에서 간단한 요기거리를 준비했을텐데 지금은 너를 데리러 와서 따로 준비해둔 게 없으니 먹고 싶은 걸 사서 들어가자고 재차 권유했다. 둘러보며 걸었지만 딱히 원하는 게 없었고 어느새 집 앞에 다다랐다.
"집에는 먹을 게 없어?"
"밥이랑 반찬은 있지. 아까 먹은 거. 새로 준비한 간식이 없다는 뜻이야."
"나는 집에 뭐가 있는 줄 알았지."
"없다고 했잖아. 없으니까 사가자고 한 거고. 지금이라도 사자. 편의점도 싫어?"
아이는 됐다고 그냥 가자며 앞장 서서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의 표정과 발걸음이 남다른 걸 눈치챈 남편이 둘이 싸웠냐고 물었다."
"아빠아아, 엄마가아, 설명을 제대로 안 해줘서 아무것도 못 샀어. 나 출출한데."
엄마가 설명을 제대로 안 했다고?
억울하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아이의 마음을 잘 알기에 실은 여러번 설명하고 여러번 물었다. 그런데 엄마가?, 엄마가 라고?
그래도 아빠에게 어리광 부리는 것이 귀엽게 보이기도 해서 싱긋 웃어보이고 말았는데.
"말해도 어차피 엄마가 안 된다고 했을거잖아."
여기서 터졌다. 어차피.
'어차피'는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거나,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쓰는 말이다. 어떠한 상황에서 수용할 때 사용하는데 체념하는 표현에 가깝다.
아이는 어떤 상황을 체념한 것일까? 엄마가 저 원하는 간식을 사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도대체 왜? 내가 언제 이런 일로 안 된다고 한 적이 있던가. 심지어 학원가는 아이가 말차라떼가 먹고 싶다고 해서 10여분을 걸어가 사온 나다.
무슨 간식을 먹고 싶다고 말 한 적도 없고, 그게 무엇인지 모르니 나는 안 된다 한 적이 없으며, 혹여 너무 늦은 시간이라 거절당할 것 같았다면 그 역시 뭐가 먹고 싶은지 알아야 해라 마라 할 것 아닌가. 아이는 먹고 싶은 것이 떠올랐을테고, 엄마에게 말 해보지 않고 안 된다 할 것이라 지레 체념한 것을 결국 엄마 탓을 해 버린 것은 너무 갔다. 상상으로 엄마와의 대화를 시뮬레이션 해보고 결론 내어버리다니.
어차피는 변명을 늘어놓을 때 자주 튀어나온다. 나를 방어하고 남(또는 상황) 탓을 할 때 찰떡으로 붙는 부사.
시험기간이라 봐줬다. 말버릇 되지 않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어차피 후회하고 사과하게 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