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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의언니 May 11. 2022

우리가 헤어진 이유

고립(1)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마음이 여리고 성품이 곧은 친구였다.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해도 핑퐁이 끊이질 않아 즐거웠다.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대신 육아휴직과 사드 배치와 히잡을 복식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따위를 논하며 새벽 4시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겨우 다섯 번째 데이트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이는 둘, 초등학교 1학년 받아쓰기 시험에서 ‘발가락’을 ‘발꾸락’으로 적은 나의 일화에서 착안해 첫째의 태명은 꾸락이로 정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왕복 네 시간이 떨어진 도시에서 시작한 연애였지만 한 주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얼굴을 마주 봤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아꼈다. 나보다 조금 더 비관적이며 내향적이고 현실적인 경제적 관념을 가졌던 그 친구는 자주 나를 걱정했다. 사람 좋아하고 대책 없이 긍정적인 내가 세상 험한지 모른다며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는 주의를 줄 정도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사람이라 삼 년 반이 지나는 동안에도 ‘ㅇㅇ씨 사랑해요’, ‘ㅇㅇ씨 예뻐요’, ‘손만 잡고 있어도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지나가는 차로부터 나를 조심시키는 몸짓, 가만가만 바라봐주는 눈길, 내가 손을 내밀면 언제나 잡아주는 손. 그런 것이 내가 받는 사랑이었다. 그보다 좀 더 낙관적이고 활동적이며 예술에 관심이 있는 나는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내가 먼저 경험했던 것들을 가져와 기꺼이 그의 처음을 함께했다. 해외여행과 미술관과 도서관에서 그는 구르는 낙엽을 보고 눈물짓는 나의 풍부한 감수성에 놀랐고, 생활비에서 지출을 떼내어 계산할 때 만의 자리 숫자에 빗금을 치고 천의 자리 숫자 위에 10을 적는 내 모습을 귀여워했으며, 남들 앞에 나서 거리낌 없이 발표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모습에 감탄을 표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에는 자존감이, 나의 마음에는 애정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는 본사가 있는 부산으로 발령받기 전까지 이년 반 동안 서울로의 이직을 준비했고, 그가 본사로 발령받은 후에는 내가 부산에 있는 회사로 이직하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사랑을 시기 질투하며 너의 사랑이 과연 나의 것만큼 큰지 저울질하던 설렘은 줄어들었지만 쌓인 시간만큼 신뢰가 두터워졌다. 지루하고 평온한 연애였다.


우리가 같은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믿음에 실금이 간 것은 여느 때처럼 그가 나의 자취방에 먼저 도착한 금요일 밤이었다. 일주일에 오일을 야근하고, 일 년 반 동안 매주 주말출근을 하던 때였다. 금요일 근무가 끝나면 그 친구는 통근버스에 몸을 실어 서울로 왔고, 보통의 경우 그의 도착시간이 내가 퇴근하는 시간보다 빨랐다. 주중에 바꿔둔 도어록 비밀번호를 묻는 전화가 왔다. 팀원들과 야식을 먹으러 밖으로 나온 한쪽으로 비껴 서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여섯 자리 숫자를 읊었고 그는 세 가구가 문을 맞대고 있는 5층짜리 빌라, 내 집 문 앞에서 그 숫자를 그대로 입 밖으로 냈다. 숫자를 찍어 보내기 싫어 말로 전해주겠다 한 것이었는데 그가 여느 때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숫자를 말하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카톡으로 보낼게, 급히 전화를 끊었다. 늦은 퇴근 후 나를 반기는 그에게 비밀번호를 따라 말하는 것은 나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일이며, 지금 당장 새로 비밀번호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으나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행동이 얼마나 무신경한 일이며 그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다는 나의 입장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날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잠들었다.


그러니 그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내 동생은 이제 내가 곁에 없으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잠에 들 수 없다는 사실을. 밤새 뒤척이다 해가 뜬 뒤 겨우 든 잠에서도 현관문 앞에 택배 박스 내려놓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깨서 옆에 있는 내가 손으로 쓰다듬어 다시 재워줘야 한다는 것을. 길을 걸으며 숱하게 보이는 남색 패딩에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밖을 나설 때면 언제나 손을 꽉 붙잡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어야 하고, 때때로 그렇게 나의 일터에까지 데려갔다는 것을. 몸무게는 53kg에서 40kg이 될까 말까 하게 줄어서 어떻게든 끼니를 챙기려면 자극적인 배달음식이라도 한 숟가락씩 먹여야 한다는 사실을. 동생과 24시간 붙어있는 날들이 늘어났고 남자 친구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었다. 그는 왜 그렇게 내가 동생에게 쩔쩔매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화를 냈고 나는 구구절절 입장을 늘어놓는 대신 입을 닫는 편을 택했다. 세상에서 우리 아빠 다음으로 나를 가장 많이 아끼는 남자가 있다면 그였을 것이다. 내가 만난 남자 중 가장 여성친화적이며 덜 가부장적이고 정치적 올바른 남자도 그였다. 그러나 나의 집 비밀번호를 입 밖으로 낸 그는 내가 그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란 동료   번이라도 그의 얼굴을 봤던 이들은 오히려 남자 친구 편을 들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입사 전부터 사귀던 사람과는 결혼해도 회사 다니면서 만난 사람과는 결혼 못한다 낭설이  정도로 업계 내에서도 업무강도가 셌기 때문이다. 상황이 고만고만했던 동료들은 알고 있었다.  80 시간씩 일하던 내부감사 기간에도 남자 친구는  집에 와서 애벌레 허물처럼 벗어둔 월화수목금요일의 옷을 정리하고 빨래 돌려 널어주었다는 . 일주일에 하루 쉬는   근처 코인 빨래방에서 이불 빨래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데이트의 전부일 때도 있다는 .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한 주를 시작하려 내가 회사로 향하는 일요일 아침에도 그는 집에 홀로 남아 화장실 줄눈에 곰팡이 제거용 젤을 발랐다가 지우고  시간 거리의 본가로 돌아갔다는 .  정도 괜찮은 남자 찾기 힘들다, 애가  착해 보이던데, 너한테서 눈을  뗐잖아, 같은 말에 나는 웃으며 말을 흐렸다.  


우리는 헤어졌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동생이 내게 전화를 한 지 5개월 만이었다. 만물이 움트는 찬란한 5월에 내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이 하나 줄어들었다. 그렇게 내 마음에 더 혹독한 겨울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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