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성폭행 피해를 알게 된 날
어슴푸레 어두워지는 저녁에 고속버스 안에서 보는 바깥의 풍경은 자주 쓸쓸했다. 다른 지방으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고속버스를 타는 일이 잦아졌다.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가지 않아도 집에서 차를 타고 5분이면 임시정류장에 갈 수 있었지만 편리하기보다 마음이 쿵하고 가라앉는 거리였다. 저녁을 먹고 나면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을 떠나 홀로 어둠 속으로 떠나야 하는데, 마음의 준비가 되기도 전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며 배웅해주었으나 그들이 나를 정류장에 내려놓고 먼저 떠나면 마치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커다란 버스에 타면 아무리 앞자리를 선점해도 과한 에어컨 혹은 히터로 인해 속이 메슥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비극적인 상황을 상상해보았다.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버스가 반대쪽에서 오는 차와 부딪히는 일. 타이어가 펑크 나면서 버스가 통째로 구르는 일. 창문이 깨지고 문은 보기 흉하게 찌그러져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는 일. 뉴스 혹은 휴게쉼터에서 전시하던 교통사고 장면을 떠올리며 나의 죽음에 슬퍼하는 이들을 상상하면 멀미로 울렁거리는 뱃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게 식상해지면 나는 가족 중 다른 사람에게 사고가 나는 것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엄마를 잃거나, 아빠를 잃거나, 둘 모두를 잃어 소녀가장이 되어 친척집에 맡겨졌다. 비극은 질리지 않았다. 심장이 찌릿하면서 진짜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머리가 좀 컸을 때부터 우울이 나의 주 정서였던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할머니는 삼 남매와 일곱 손주들을 자기 손으로 키워내고 나서 빈 둥지 증후군을 앓았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아빠의 외도를 의심하며 새벽 세 시까지 컴퓨터 앞에서 벽돌깨기 게임을 했다. 행복한 어린이였던 나도 유구한 유전의 흐름에 일찌감치 항복한 것뿐이다. 그렇게 수없이 나를, 엄마를, 아빠를 죽이면서 버스를 타는 동안 내가 우는 경우는 단 한 가지였다. 동생의 사고를 상상할 때였다. 그게 왜 스스로가 고속도로 교통사고 중상자 혹은 사망자가 되거나 고아가 되거나 한부모 가정의 아이가 되는 것보다 더 슬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상상 속에서 동생에게 사고가 날 때만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울고 싶은 기분이 들 때면 동생을 죽였다. 연기자 지망생이었다면 치트키로 삼을 정도로 쉽게 눈물이 나왔다.
2018년의 새해 첫날 나는 연인과 남쪽 도시에서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침대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대학은 졸업한 지 오래였고 나는 연인과의 관계에서 작은 안정을 찾았으며 설치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동생에게서 국제전화가 왔다. 동생은 며칠 전 해외로 단기 어학연수를 떠난 차였다. 새해 복을 많이 받으라고 했는지, 잘 지내고 있냐고 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다음에 동생이 했던 말 뿐이다.
“언니, 놀라지 말고 들어.”
“내가 성폭행을 당했어.”
우울은 고속버스 창에 이마를 기대고 불행을 연습하던 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집채만 한 그것은 동생의 성폭행 피해와 함께 순식간에 6.5평의 원룸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