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연말, 책 선물 어때요?

제1화.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_박연준 산문집

by 셀끽

바야흐로 연말입니다.라는 인사말을 좋아합니다. '이제 한창, 지금 바로'라는 뜻을 지닌 부사인 바야흐로의 어감이 좋고요, 그리고 연말만의 감성과 분위기도 좋아요. 한해를 어떻게 보냈든 비죽비죽 삐져나오는 하루하루를 한 봉지에 담아 묶어버릴 수 있고요, 새 봉지를 꺼내 후후 불어 기대감으로 부풀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서로의 등을 다독이며 고생했어, 한잔해~로 퉁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는 2025년 새해를 시작하는 첫 책이었어요.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고요. 과이리의 제안(아이디어 뱅크를 맡고 있어요)으로 상반기 6개월 동안 멤버들이 한 달씩 돌아가면서 자신의 테마가 되는 책을 선정해서 진행하기로 했어요. 예컨대 나의 인생책이나 평소에 읽어보고 싶었던 책 같은 거요. 다독다독에서 마음대로 책을 고를 수 있다는 건 절대 권력인 셈이죠. 작년과 재작년에는 분기별로 카테고리를 나눠 읽을 책을 추천받아 투표했어요. (참고로 2024년의 주제는 1분기:독서&모임, 2분기:소설, 3분기:결혼, 4분기 환경이었답니다.)


어수선한 연말이었어요. 비상계엄과 탄핵소추,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상했어요. 정말이지 인생은 이상했어요. 인생의 얄궂음에 속수무책 어찌할 바를 몰라할 때 대장 항항이 골라 온 책은 우리의 마음을 쓸어줍니다. 항항은 소개했어요. 대학생 때 언젠가 읽고 빠져버린 문체('소란'을 읽고요), 어느덧 가장 사랑하는 시인, 시의 언어로 슬며시 쓰인 산문의 정수라고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죠. 책을 선물하는 사람과 책 같은 건 쓸데없다며 좀 더 실용적인 선물을 하는 사람이요. 뭐든 간에 선물이라는 건 참 좋은 건데 말이죠. 저도 책 선물을 합니다. 항항도 책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고요. 그 사람이 읽으면 좋을 만한, 그 사람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내가 너어무 좋아서 그 사람도 같이 좋아했으면 하는 책을 고르는 마음이 진짜인 선물인 거죠. 항항은 박연준 시인의 책을 자주 선물한다고 했어요. (당시) 최근에도 이 책('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을 몇 차례 선물했다고요. 선물 같은 책,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지러운 연말에 마음을 쓸어줄 따뜻하고 부담 없는 책. 숨을 작게 내쉬고, 초콜릿처럼 꺼내먹을 수 있는 책이요.


제일 처음 눈에 띄었던 건 출판사가 '달'이라는 거예요. 달은 이병율 시인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거든요. 그의 여행산문집('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무척 아껴서 가끔씩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다시 읽곤 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작가의 소개글이요. '파주에 살며 시와 산문을 쓰는 사람.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우고 ... 라일락 향, 공책들,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니요! 사람 자체가,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문학이잖아요. 호감을 가득 품고 책장을 펼칩니다.


이번 책은 기록해 둔 녹음 파일도 없고, 기억에 남아있는 내용이 없어서 제 마음대로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지만) 브런치에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잖아요. 불편한 마음으로 마감일을 넘기면서 정작 아무것도 안 하고! 항항이 달래주는 말처럼 가볍게 가볍게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쓴다는 마음으로... 그렇다고 쓰레기를 주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선물을 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 산문집은 시인의 시선으로 선물, 문학, 인생, 아버지, 친구, 삶을 살아가는 자세, 좋아하는 책과 장소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시선이 몹시 꼼꼼하고 따뜻해서 오히려 마음이 아린 거죠.


밑줄 그은 문장들을 소개해 볼까 해요.

p.12)

"할머니가 자애로운 손길로 내 얼굴과 머리카락, 이마를 쓸어주는 게 좋았다. 마치 내 존재 전부를 쓸어주는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더 불쌍해지고 싶었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사랑에는 언제나 한 방울의 연민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저 좀 쓸어주시겠어요? 나 안아..!


p.30~31)

"멋이란 자연스럽고 견고하고 건강한 것이다." "진정한 멋을 위해선 일단 자연스럽게 숨쉬는 게 중요하다." "무리하지 않고 나답게, 편안한 자세로 사는 일."

요즘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라는 말에 꽂혔는데요, 요즘의 저는 아무리 봐도 인생이 숙제 같거든요. 도장 깨기.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사는 거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등산' 말고 '나무 그늘'을 보자.


p.37)

"진심과 진실로 이루어진 원석 한 덩이가 당신이 가진 재료의 전부입니다. 전부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 잠깐 한눈을 팔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 무게도, 색깔도, 높이도, 깊이도 없는 것."

진심과 진실의 원석 한 덩이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도 언젠가. 그 한 덩이를 믿고요.


p.55, 59, 62)

"'옛날'이라는 계단이 있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다보면, 후미진 자리에 털썩 앉아 무릎을 끌어안게 되는 시간. 이제 내 곁엔 네가 없다는 통렬한 자각이 별안간 나를 계단 아래로 떨어트린다."

"나와 윤 사이에 조그만 웅덩이가 생긴 것 같았다. 웅덩이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둘 사이에 서로 모르는 고단한 일들이 생겨, 웅덩이로 빠져버리는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세월이 가면 우정은 사소해진다." 별일 없이 마음을 다치게 하네. 시는 이게 문제다. 읽다 자꾸 베인다. 다쳐도 피가 나지 않는 상처가 있다. 세월에 사소해진 내 우정이 아파서, 몇 년 만에 용기를 내 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파요. 용기는 못 냈어요.


더 빽빽하게 줄을 그었는데요. 직접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가장 마음을 울렸던 문장은 적지 않았어요. 연말연시, 삶의 결을 쓸어봐요. 첫눈이 내렸어요. 늦지 않게 돌아오겠습니다. 인생이 너무 알 수없고, 모순덩어리인 거 같지만요. 힘 빼고, 자연스럽게, 한 해 동안 쌓여버린 악과 독을 하얀 눈과 함께 녹여버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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