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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엔지니어(4)

일본 (1) - 일본에서 배웠다

by 좀 달려본 남자

일본(1) - 일본에서 배웠다


2022년말 회사에서 신입사원들과 면담을 하는데 깜짝 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임연구원 (8년차 이상 연구원)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회사 차량개발시험법은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에서 다 베낀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야! 풀스토리를 아는 나로서는 놀라웠다. "그랬었다. 하지만 그 이후 우리가 다시 만들었다"가 빠졌던 것이다. 한참 어려웠던 2010년대를 보내면서 회사에서 거의 8년이상 신입사원을 뽑지 않다보니 회사내 세대간 소통에 문제가 있어보였다.

그래서 그 때 아직 초창기 과거를 기억하는 멤버들이 퇴직하기 전에 각 시스템별로 초창기부터 개발시험 역사를 정리하여 신입사원들과 공유하라고 했던기억이 있다.

그래서 일본자동차와의 초창기에서 현재까지의 관계를 정리해보았다.


1980년대 말에는 일본의 MMC(미쓰비시 자동차)가 현대자동차 회사 지분을 30%정도 가지고 있었고, 엔진등 주요 파워트레인 부품뿐아니라 샤시부품까지 미쓰비시 자동차에서 설계 한 것을 대당 얼마씩 일본에 로얄티를 주고 도면을 사와서 생산하면 형태였다. 포니, 엑셀등 차체 디자인은 할 수 있었지만 차량의 핵심인 엔진 및 샤시부품을 개발할 능력은 되지 않았었다.


이때는 아직 차량시험 기술력도 매우부족하여 이전에 차량개발은 선진메이커에서 하고, 생산만을 현대자동차에서 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선진메이커 였던 그 당시 미국의 자동차 회사 BIG3 GM, 포드, 크라이슬러등 흘러나온 자료들과 학회 논문들을 참조하여 차량개발시험법을 조금씩 만들어 가는 수준이었다.


이 당시 유명한 드라마 모래시계에 나왔던 각 그랜저 프로젝트가 현대자동차와 미쓰비시 자동차와 공동으로 이루어졌었다. 손이 많이가고 원가가 높지않은 차체 (Body Structure)는 인건비가 싼 한국에서 개발하고 생산하여 일본으로 보내고, 기술력이 필요한 엔진등 파워트레인과 샤시부품은 일본에서 개발하여 한국으로 수입하는 형태로 각각 두 자동차 메이커에서 생산하기로 하였다. 물론 현대자동차는 로얄티를 지불하는 형태였다. 한국에서는 '그랜져', 일본에서는 '데보니아'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이 당시에 자동차 시험부분의 미쓰비시 자동차의 프로젝트 총괄담당은 약 35년 근무한 경력자 스즈끼 과장이 었는데, 과장이라고 하지만 현대자동차 과장과는 급이 달랐다. 그 당시 현대자동차 울산연구소 하나의 차량시험과에서 3명이 했던 업무는 현재 남양연구소에서 200여명이 하는 실급업무로 발전됬으니 짐작할만 하다.


현대자동차 과장은 초창기 인원이 없었던 관계로 조기진급을 통해 약 8년차 정도 였었고, 그 당시 부장은 약20년 정도였으며, 부장이상들은 대부분 현대건설이나 현대중공업에서 입사하여 일을하다가 현대자동차로 전직한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자동차 개발시험 경력이 짧아 현대자동차 엔지니어가 다 붙어도 스즈끼 과장 혼자를 기술력으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이 당시 두 회사의 개발회의 공식 회의록을 내용에 형인 '미쓰비시자동차'가 아우인 '현대자동차'와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는.... 라고 기입되 있었는데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미쓰비시자동차의 의견을 따라야만 했었다.


그당시 기억을 해보면

1) 일본엔지니어가 하는말과 자료는 차량개발시험 경험과 기술력이 없던 그당시에 매우 소중했었기 때문에 일본과 공동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회사에서 일본어 공부를 꽤 열심히 했었다.

2) 일본가려면 비자도 필요했었고 낯선 곳 이었기 때문에 부산에서 비행기 타고 부터 처음 출장갔을 때 나고야 공항에서 부터 꼼꼼하게 버스타고 내리는 위치등을 기록하여 다음 출장자들에게 전달하여 헤메지 않도록 하였다.

3) 그 당시 미쓰비시 자동차의 점심시간을 보면서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조깅하는 사람, 책을 읽는사람...

90년초에는 아직도 사회를 지배했던 군대문화 살아있어 회사내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어 '상명하복' 등이 대세여서 점심시간조차 눈치보면서 지내기가 일 수 였는데, 현재의 우리나라 모습을 그때 본 것 같았다.

4) 자동차 차체와 도어 사이에 갭 및 단차관리가 중요한 이때 주고 클레이 (찰흙)을 가지고 하면 오염이 되어고무찰흙을 사용하였는데 국산품질이 좋지않아 일본 고무찰흙을 사용하였는데 품질이 좋아 잘 뭉쳐지고 오염없이 깔끔하게 떨어져 매번 출장때마다 일본 문방구에 들려 사왔었다.

5) 일본 오까자끼 (미쓰비시자동차 연구소) 연구소에 갔었는데 그당시 한국대비 8배정도 월급을 받았던 일본엔지니어들이었지만 일본 물가가 워낙비싸서 그리 풍족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현대자동차에서 3명이 출장을 갔는데 프로젝트 비용으로 공식적인 저녁식사를 하는데 무려 30여명 정도의 미쓰비시 엔지니어가 참석하였는데, 우리가 반가워서 왔다기 보다는 자기돈으로 음식과 술비용을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는데 대화가 거의 없이 짧은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


공식적으로는두회사가 협업은 하고 있었지만 협의된 자료외에 다른 기술정보를 제공하기는 어렵다는 입장과 이번기회에 부족한 부분을 많이 배워보자는 현대자동차의 입장이 보이지 않게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서 일본 엔지니어들에게 질문을 하였을때 처음에는 일본 대학서적을 주면서 "여기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이다" 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같은 자동차 개발 엔지니어로서 입장을 이해하여, 저녁식사하면서 궁금했던 것에 대해 대답을 해주어서 많이 배웠고, 그동안 우리가 알던 차량시험은 매우 미흡하였음을 다시한번 느끼게 되었다.

이때 얻은 정보는 설계부분이 가장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차량시험부분도 내구시험의 문제점 지수화 방법, 내구 노면관리 차량제작 및 등급관리등은 새로운 관점에서 프로젝트를 관리할 수있는 지표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미쓰비시자동차 연구소에서 그당시 우리회사에 없었던 실차풍동 (Wind Tunnel)등 다양한 차량시험설비등을 보면서 꼼꼼히 적어온 것들이 추후 남양연구소로 이전하여 새롭게 차량개발 연구소를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90년 초반에 두 회사간 '그랜저 프로젝트' 1차 협력을 통하여 얻은 차량시험 지식들은 추후 엘란트라와 쏘나타 차량을 베스트셀러카로 개발하는 기본을 만들 수 있었다. 이후 Face Lift (모델 부분변경)때문에 2차 협력이 90년 중반부터 다시 진행하게 되었다.

일본(2) - 일본을 넘어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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