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가장한 에세이
어질러진 도미노 조각들을 한쪽으로 긁어모은다. 그리고 다시 하나씩 세운다.
이미 흩어져버린 의미의 조각들처럼.
도미노가 왜 좋은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늘 도미노를 세우고 있었으니까.
넘어지면 다시 세우고, 넘어지면 다시 세웠다.
그리고 넘어지지 않으면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 빽빽해도 무너지는 것이 도미노이니까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마치 달리고, 쉬었다가 다시 달리는 인생처럼.
세워진 도미노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살짝 민다고 해서 쉽게 넘어지는 두께는 아니다. 그렇게 공을 들여 하나를 올리고 나면 바람이 살랑인다고 해서 처음부터 다시 쌓지 않아도 된다.
그게 참 좋다.
그럼 내가 왜 도미노를 쌓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까. 그건 바로 그의 질문 때문이었다.
“난 그 종교가 불편해. 인간은 모두 흔들리잖아. 많은 사람들이 그렇고. 그런데 저런 말을 들으면 마치 흔들리지 않는 게 정답처럼 느껴져서 불편해.”
그 말은 [네 눈이 범죄 할 것 같으면 눈을 뽑아 버려라]라는 말이었다. 지도자는 수십 년 간 모임을 이끌면서 얼마나 크고 작은 문제를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전하는 이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했다. 공동체 안에서 누가 죄를 짓도록 유혹을 한다면 새로운 공동체로 옮겨도 좋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얼마나 시달리고, 얼마나 무너지는 도미노를 많이 봤으면 저럴까 하고.
물론 나도 눈을 뽑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절대.
내 눈은 소중하니까.
눈을 뽑는 대신 할 수 있다면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빠를 것이다.
내게 질문과 같은 의문점을 던진 그의 말이 어떤 뜻인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그 말은 나를, [내가 왜 도미노를 세우기 시작했는지?]라는 질문으로 이끌었다.
그랬다.
"나는 흔들리는 것이 싫다."
그것도 아직까지는 현재형으로 싫다.
그래서 내가 추구한 것이 일관성 있는 도미노였다.
도미노를 일관성 있게 끝까지 세우고, 위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면 [구조]가 보인다.
내가 왜 도미노를 하나씩 세웠는지.
그래서 삶의 위기도, 행복도, 기쁨도, 슬픔도 하나씩 세우고 나면 내가 그리고자 했던 삶의 도안이 완성되는 것이다.
옆집의 스피노자 선생님은 내가 도미노를 세우는 모습을 꽤 마음에 들어 하신다. 그의 철학이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 도미노를 세우다 강론을 들으러 갔을 때 해주신 말이 있다.
옆집에 파이어족 김로또 씨를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김로또 씨는 로또에 맞아서 더 이상 짜인 일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했다. 로또에 맞은 지는 이제 겨우 일 년이 지났다고 한다.
스피노자 선생님은 베란다 창문을 통해 불이 환하게 켜진 그 집 안을 보라며 나에게 손짓했다. 타인들이 모두 수발을 들어주어 저렇게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비구조의 삶이 너에게는 행복해 보이냐고.
그리고 아파트 공원 아래에서 매일 러닝을 하고 있는 하루키 선생을 보라고 했다. 그는 평생 먹고살 자본을 가졌음에도 왜 매일 달리기를 하는지 한번 맞춰 보라고 했다.
“그럼 어떤 구조여야 하는데요?”
‘도미노만 잘 쌓으면 되지.’
도찐개찐인데 일장연설을 하는 선생님께 괜한 반발심이 들어 질문을 훅처럼 던져본다.
“그것은 네가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는 구조이지.”
나의 본질, 코나투스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그것은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일관성]이었다.
그래서 나는 흔들리는 것이 싫은 것이었다. 흔들려 흐트러지면 그것은 일관적이지 못하고, 일관적이지 못하면 구조를 볼 수 없다.
구조는 논리적 연결의 안정성 위에 있는 것이니까.
그토록 의미를 찾아 헤매는 것도 돌아가는 구조를 헤아려 이 세상의 도미노는 어떤 도안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해냈을 때의 만족도가 그 어떤 환희보다 기뻤던 이유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도.
지금 이렇게 서술하는 것도 모두 일관된 구조.
그 자체가 모두 내가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는 구조, 정렬 본능인 것이다.
그럼 정렬 본능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걸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나는 지성 집합에게 물어본다.
A. 맥락 중심형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반응한다. 어제의 나보다 지금의 맥락이 중요하다. 모순이 생겨도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
B. 감각·경험 중심형
일관된 세계관보다 경험의 밀도를 중시한다. 정합성보다는 생생함이 우선이다.
C. 외부 정렬 위임형
내부 기준을 강하게 세우기보다 집단, 전통, 역할 규칙에 기대어 간다. 자신의 일관성보다 틀 안에서의 유능함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이 정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이렇단다.
1. 정체성을 고정물로 보지 않아서
자신을 변하는 존재로 본다. 모순은 성장 과정이다.
2. 심리적 비용 회피
내면을 정렬하는 에너지를 아끼고 관계나 활동에 투자한다.
3. 불확실성에 대한 태도 차이
내부 흐름을 타느냐, 외부 흐름을 타느냐의 차이.
“정답은 없어.”
역시 지성집합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저쪽 편을 들어도 내가 질문할 것이고, 내 편을 들어도 그 대답이 객관적인지 다시 질문할 테니까. 아니면 이것이 진실이라서일까.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아와 타자가 관계라는 이름으로 엮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얼마든지 자신이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의 진동은 타자에게 퍼진다. 그러면 하나의 도미노가 흔들릴 때 연결된 도미노는 당연하다는 듯 차례대로 넘어진다.
내가 용납하지 못하는 한 가지.
내게 벌어졌던 가슴 찢어지는 일들이
그저 내게는 타자였고, 그들에게는 자아였던 상태들이
그저 잠깐 흔들렸을 뿐이었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들의 장난, 혹은 가벼운 흔들림에
살이 베여 나갔던 것이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폭력들이
그저 흔들렸을 뿐이라는 것이.
“너는 그냥 나라는 자아의 배경이었을 뿐이야.”
그들이 내게 말한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지금까지 넘어질까 숨을 고르며 세워 두었던 도미노를 쓸어버리고 싶어진다.
누구나 흔들리는 존재이니까.
그러자 스피노자 선생님이 또 달려와 땅콩을 때린다. 어이없어 쳐다보니 꿀밤을 한 대 더 먹이며 말한다.
후회는 과거의 네가 자유로웠던 만큼만 하는 거라고. 네 노력을 스스로 후회로 바꾸지 말라고. 다만 이제는 도미노를 세우는 이유를 타자에게서 찾지 말고 네 안에서 찾으라고.
좋아 보여서가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 들 때. 좋아하는 것이 생겼을 때. 네가 즐길 수 있는 것들의 도미노 조각으로.
타인의 영향으로 도미노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도 하나의 도미노를 더 올리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역시 아직 나의 도미노는 갈 길이 멀다. 언젠가 다 완성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여기까지가 하나의 그림이었던 걸까.
나는 미래도 과거도
아무것도 재단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지금 도미노를 세우고 있다.
도미노를 세우는 코나투스가 행복했다.
그리고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