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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너비미 Apr 29. 2024

단조로움을 수용하라

자극적 쾌락과 당신의 삶 전체를 맞바꾸자고 한다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을 규정하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MZ세대, 그들의 습관이나 선호를 분석한다면 유튜브 쇼츠 선호현상처럼 말이다. 그중 요즘 핫한 것은 도파민 중독이 아닐까 싶다. 도파민을 일으킬 만한 것들에 중독되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고 생긴 용어인듯 했다. 


인생에서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오히려 길을 잃은 기분이 드는 것 같다. 특히 창조적인 행위를 해야 돈을 버는 직업을 제외한다면 열심히 노력하여 어딘가에 입사를 하고 나면 내가 개판을 치지 않는 이상 회사는 나를 쉽게 자르지 못한다. 우리는 매달 월급을 받고 그 모든 일에 자연스럽게 순응한다. 다음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더 이상 목표를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 우리는 배회한다. 목표를 이룬 것 같지만 또 다시 공허하다. 그렇게 다음 목표는 결혼이 된다. 그렇게 결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을 만나보는 일을 택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 중 가장 많은 걸 가진 상대방을 고른다. 세상이 빨리 변하는 만큼 사람의 가치도 효율로 평가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이 아니면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이 아니면 또 다음 사람. 다 괜찮지만 가끔 방법론이 목적을 잡아먹는다. 


결혼이 다음 목표가 되는 것은 전혀 잘못되지 않는다. 본인이 원한다면 말이다. 중요한 것은 결혼이라는 목표는 정량화될 수가 없다. 결혼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는 일이 결혼이다.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많이 가지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결혼을 정의를 그대로 따른다면 달성할 확률은 희박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달성한 경우의 수를 결혼이라는 필연의 확률 1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기도 한다. 스스로를 끝까지 속일 수 있는 자신이 있다면 자신의 계산에 오류가 있었다고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럼 나와 같은 사람이 답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풀이가 틀리지 않길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바로 [수용하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는 오류가 난 상황에서도 정답을 향해 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수용해야 하는가? 첫째, 바로 현재를 수용하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느끼는 감정, 처해있는 상황, 선호도를 수용하는 것이다. 앞서 나열한 것들은 과거의 나의 선택들이 만들어낸 현재의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설령 현재가 행복하지 않더라도 수용을 통해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바로 과거에 내가 선택한 것들을 수용하는 것이다. 


번째는 행동에 대한 수용이다. 현재의 결핍에서 무언가 바꾸고 싶은가? 그런데 사회적인 시선이 신경 쓰이는가? 무시하라. 범법행위로 인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여러분은 스스로의 삶을 좌지우지할 권한이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말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문장이 여기서 인용되면 좋겠다. 예를 들어 자신을 위한 선택이 타인의 시선에서 파괴처럼 보일지라도 뒤처지는 것 같아도 나 자신이 원하면 괜찮다는 것이다. 조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때 가장 행복할까? 집단 지성이 압축적으로 가득 찬 AI가 내려준 선택을 할 때 일까?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체적으로 선택한 순간이 행복할까? 거시적 행복이 담보되기 위해선 작은 미시적 행복이 축척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매 순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에도 부족하다. 


세 번째는 만족에 대한 수용이다. 날씨가 따사로운 어느 봄날 삼삼오오, 남녀노소 섞여서 정답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산책하는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미소를 띤 나의 모습을 관찰하는 타인이 있다면 그도 나를 보며 안온함을 느끼지 않을까? 우리가 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땐 제발 단 하루라도 평온하길 바란다. 하지만 평온한 하루들이 길게 주어지면 우리는 금방 싫증을 내고 누군가 나타나 내 삶을 자극적으로 만들어주길 원한다. 그러나 타인이라는 외부변수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하루는 안온했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한 꺼풀만 걷어내면 당신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몰입해 버리면 당신의 안온하고도 평화롭던 하루는 왠지 불행해 보이며 남들이 가진 것을 못 가진 부족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렇지 않다. 나와 당신은 그저 자신의 하루를 살고 있을 뿐이다.  자족할 줄 아는 마음 그것이 세 번째 수용이다. 


축하한다. 이제 두 번째 단계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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