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찰스 Aug 24. 2016

다락방 소녀를 기억하십니까

사랑 편

- 다락방 소녀를 기억하십니까 -


오늘 밤만은 마음껏 축하를 해도 좋을 것이다. 좋은 시절은 이제 그 막을 내렸지만, 그것은 앞으로 천 년쯤 우리를 버티게 해줄 기억이 될 테니까.
- 황경신, 『아마도 아스파라거스』중.


오래전 다락방에, 그림을 예쁘게 그리던 아이가 살았어요. 어른이 되어 만났지만, 그녀가 소개해준 다락방 소녀는 따뜻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였어요. 그렇지 않아도 내게 웃음이 되던 그녀가 그토록 예쁜 아이였다니,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사랑에 빠지는 것 말고는.


아쉽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썩 길지 않아, 나는 매일매일 그녀와 대화했어요. 보통 삶의 무게나 하루의 슬픔과 기쁨, 때로는 이별이나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때마다 내 하루의 슬픔과 기쁨은 그녀였고, 그녀의 이별과 사랑은 내가 아니었다는 게 조금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좋은 시간들이었어요. 생에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어요. 받지 못하는 사랑이어도, 줄 수 있는 사랑에 감사하던 날이었어요. 특히 그 날은요. 푸른 여름 초입쯤의 어느 날. 별들이 우리를 지켜보던 밤이었고, 바람이 우리를 안아주던 밤이었고, 귀뚜라미가 우리를 위해 노래 부르던 밤이었어요. 그날의 우주는 내가 마음 놓고 그녀를 사랑할 수 있도록 움직여줬고, 덕분에 내 모든 호흡은 그녀에게로 향할 수 있었죠.


그래서 나는 사진을 한 장 찍어뒀어요. 그날의 향이나 언어들을 담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앉아 있던 그 자리를 잊고 싶지 않았거든요.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 벌써 계절이 여덟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그 한 컷을 채우고 있는 그녀와 나무, 잔디와 가로등은 여전히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날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나는 좋아요. 그녀를 만날 수 없는 오늘을 살고 있지만요. 갑작스러운 폭우에 온 몸이 젖는 것처럼, 느닷없는 사랑에 대책 없이 젖어봤으니. 내 마음 글자로 적어, 그녀에게 작은 기쁨 하나 남겼으니. 그녀 또한 어느 날 뜬금없이, 나를 떠올릴 수 있으니. 이런 이유들로 나는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역시 그날의 기억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남겨진 자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