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길고 지루했던, 혹은 다른 의미로 짧았던 시간이었다. 어떻게 다시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는 새 피아노 연주가 끝나버렸기 때문에.
연주가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환한 얼굴로 박수 치는 그 여자가 보였다.
'그래, 아자!'
용기나 기합 따위를 주머니에 가득 넣고 그 여자에게 다가가려는데,
"야! 그쪽 아니야!" (하.. 이 망할 놈이.)
"알아. 너 일단 좀 나가 있어 봐."
친구를 떠밀듯이 밖으로 내보낸 뒤 다시 그 여자에게 가려는데, 어느새 없어져버렸다.
(하.. 역시 망할 놈..)
서둘러 밖으로 나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다시 찾아낼 수 있었고, 다가가 말을 건넸다.
"공연은 잘 보셨어요? 이렇게 또 만났네요?"
꽤 놀라고 있는 여자의 표정은,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정말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덩달아 옆에 있던 친구까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오래 붙잡아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명함만 건네주고 돌아섰다.
'연락이 꼭 와야 할 텐데..'
어느새 친구 녀석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질문과 놀림을 동시에 쏟아내고 있었다.
"연애 안 한다며?"
그랬지. 사실 이제 연애 따위 하고 싶은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그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다만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하면서 무언가 '나는 이 여자를 또 만나야겠다, 그렇게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들어찼던 것뿐이다.
새로운 만남은 지난 사랑이 날 떠난 뒤부터 지금까지의 내 생각을 바꿔줄 수도 있겠고, 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좋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으며, 그러므로 이후의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들은 역시 구경, 혹은 놀림거리로 전락하기 딱 좋은 소재여서 친구는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며 날 꼬여냈고 결국 나는 소주 한 잔과 함께 오늘의 에피소드를 고백했다.
"야, 괜찮네! 운명이네, 운명이야!"
친구는 나보다 더 이 상황에 몰입했고 운명이란 말을 연신 쏟아내며 낄낄거렸다.
우연이긴 한 것 같은데 운명이라. 사실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술병은 점점 비어갔고 그 사이 잔뜩 취해버린 친구가 날 향해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야, 너 연애해라. 그동안 충분히 힘들었고, 그 정도면 걔한테 의리도 지킨 거야. 이제 이별남 코스프레 같은 거 그만하고, 연애해. 잘해봐라!"
내가 많이 힘들어 보이긴 했는 모양인지 이 녀석 꽤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일단 쓸데없는 죄책감 또는 부질없는 욕심 같은 것들을 가지지 말자고, 그저 이 좋은 느낌에 충실하자고.'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했다. 그리고 혹 연락이 온다면 내일 만남은 어디서 해야 할지, 어떻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나이스!'
그 여자의 이름은 '강사월'.
어쩜, 이름도 예쁘잖아.
시간이 늦은 것 같아 오늘 봤던 그린비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며 말을 마쳤다. 하고 싶은 말은 얼마간 더 있었지만 내일을 위해서 아껴두는 셈 치고. 그리고 눈을 감았다.
오후 두 시.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그런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