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여름이 좀 더 머무르고 싶은 모양인지, 한 낮의 해가 내 이마에 땀방울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밤새 설친 덕에 피곤기는 그대로였으나, 이런 설렘 가득한 발걸음이 오랜만이라 걸음은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한 시 오십 분.
카페는 어제보다 한산했다. 아직 그녀는 보이지 않았지만, 금방 올 것 같은 느낌에 카라멜라떼 두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 진동벨이 울렸고 잔을 받아 들고 자리에 돌아와 앉으니 그녀가 들어왔다. 어제보다 더 여성스러운 차림의 매력적인 그녀는 멋쩍은 듯 웃으며 내 앞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대각선이 아니라 앞자리네요"
가벼운 인사말을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전기 같은 것은 통하지 않았지만 온기가 잘 전해지는 고운 손이었다.
"어제는 많이 놀라셨죠? 실은 어제 앉으실 때부터 느낌이 좋았거든요. 꼭 다시 뵙고 싶더라구요."
"네, 저도 신기하긴 했어요. 공연장에서도 만나게 될지는 정말 몰랐거든요."
(뜨끔)
공연 내내 찾았다고 말했다가는 흐름을 완전히 망칠 것 같았다.
"그러니까요. 저도 말은 그렇게 하고 갔는데, 실제로 다시 만나게 되니까 너무 신기하더라구요. 하하."
(좋아, 자연스러웠어!)
"명함 드리고 나서는 친구 놈이 어찌나 닦달을 하던지 아주 혼났어요.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매 번 명함을 뿌리고 다니지는 않는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친구에게 들볶였다고 하니, 여하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미소를 담고 있었다. 별 얘기도 아닌데 대화를 하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아주 명랑하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성북동에 산다는 것이었다. 바로 옆동네에 살고 있었다니, 언젠가 한 번 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다며, 또 한 번 신기해했다. 인연이니 운명이니 잘 믿는 편은 아니지만,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자꾸만 겹쳐지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투명한 플라스틱 컵 사이로 보이던 커피가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할 쯤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해왔다.
"걷는 거 좋아하세요?"
아무렴! 지금은 뭘 해도 좋을 수 있었다.
"그럼요! 날씨 좋던데 밖에서 좀 걸을까요?"
커피 한 잔이 비워질 동안 해는 커다란 구름 뒤로 숨어들었고, 적당히 살랑대는 꽃바람은 역시 빠질 리 없었으며, 공원에는 초록이 가득해, 어디에서도 부족함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날의 걸음이 얼마만인지. 이런 시간을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그녀가 내 가슴에 손을 올려두는 듯했다.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참 좋았다. 어제처럼 당황스럽지 않았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적인 느낌을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역시나 또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이쳤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분명히 강사월이라는 사람이 좋다는 신호였다.
다른 약속 때문에 헤어져야 할 때쯤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꼭 또 만나요. 저는 오늘 굉장히 좋은 시간이었어요."